퇴직에 진심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은권 씨는 모든 게 낯설다. 특히 은행 업무는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얼마 전에는 급여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다가 재직증명서를 가져가지 않아 두 번 발걸음을 한 적도 있다.
이에 반해 같은 부서 동기 민주 씨는 펀드, 적금, 주식투자 등 모르는 게 없다. 은권 씨는 내심 금융상품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끝난 연말정산 때 민주 씨가 많은 세금을 환급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은권 : “민주 씨, 어떻게 하면 연말정산 때 돈을 환급받을 수 있죠?”
민주 : “저 같은 경우에는 작년에 가입한 IRP 혜택을 톡톡히 봤어요.”
은권 “IRP요?”
민주 “네. 매월 30만 원씩 자동이체하다가 연말 보너스로 추가 입금을 좀 했더니, 이번 연말정산 때 100만 원 정도 세금 혜택을 본 것 같아요.”
은권 : “백만 원요? 한꺼번에 그렇게나 많이요?”
은권 씨는 백만 원이라는 숫자에 작년에 미리 가입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당장 거래 은행에 문의하니 신분증과 재직증명서만 있으면 언제든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서류를 챙겨 회사 1층에 위치한 은행으로 달려갔다.
은권 : “IRP 가입하고 싶어요. 우선 10만 원 입금하고, 다음 달부터는 매월 3일에 30만 원씩 자동이체 등록해 주세요.” 직원 :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은 이번이 첫 가입이시니 전 금융기관 합산 연간 입금 한도인 1,800만 원 전액을 저희 은행으로 등록해 드릴까요?”
은권 : “그게 무슨 말이죠?”
직원 : “IRP는 꼭 하나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이나 증권회사별로 개설할 수 있지만, 전 금융기관을 통틀어 1년에 입금 가능한 총액은 1,800만 원으로 제한됩니다. 고객님은 다른 곳에 가입한 것이 없으니 1,800만 원까지 설정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다른 곳에도 만드실 거라면 한도를 나누어 설정하시면 됩니다.”
은권 : “1,800만 원을 설정하면 올해 꼭 그만큼 입금해야 하나요?”
직원 :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입금할 수 있는 ‘최대한도’ 일뿐입니다. 그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입금하시면 됩니다.”
은권 씨는 다른 은행을 갈 일이 없겠다 싶어 우선 한도는 1,800만 원으로 설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상담원이 건넨 다음 말에 은권 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직원 : “고객님, 꼭 염두에 두실 사항이 있습니다. 이 상품은 입금액의 최대 16.5%를 세액공제로 돌려받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고객님이 이미 납부한 세금을 돌려받는 것입니다. 낼 세금이 없다면 돌려받을 것도 없어요. 또한, 5년 유지와 만 55세 개시라는 두 조건을 모두 채워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전에 해지하거나 일시금으로 받게 되면, 그동안 받은 세금 혜택을 다시 토해내야 합니다. 입금한 원금뿐만 아니라 운용을 통해 발생한 수익금에 대해서도 16.5%의 기타소득세를 부담해야 하니 결과적으로 손해일 수도 있습니다.”
은권 씨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민주 씨에게 들을 때는 무조건 좋은 상품 같았는데, 막상 설명을 들으니 섣불리 결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얘기는 민주 씨한테 못 들었는데...’ 지점을 나오던 은권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민주 씨를 마주쳤다. 자초지종을 들은 민주 씨는 침착하게 답했다.
민주 : “저도 가입할 때 고민했던 부분이에요. 중간에 해지하면 손해니까요. 하지만 저는 어차피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할 예정이라 매년 받는 연말정산 이득이 더 커 보였어요. 나중에 이직할 때 퇴직금을 넣어서 운용할 수도 있고, 혹시라도 개인사업을 해도 혜택은 유지되니까요. 무엇보다 강제로라도 노후 자금을 묶어두니 돈을 더 타이트하게 관리하게 되더라고요. 자동이체 금액은 나중에 조정할 수도 있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은권 씨는 다시 은행을 찾아 비로소 가입을 완료했다.
어느덧 1년이 지났고, 이번 연말정산에서 쏠쏠한 환급을 확인한 은권 씨는 민주 씨에게 점심을 대접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은권 : “민주 씨 덕분에 이번 연말정산 때는 돌려받는 금액이 상당하네요!”
민주 : “다 은권 씨가 잘 선택하신 거죠. 그나저나 최근 수익률은 어때요? 저는 작년까지만 해도 손실이 나서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최근에 미국장이 올라서 요즘 기분이 정말 좋아요.”
은권 : “네? 수익률요? IRP는 세금 혜택만 보면 되는 상품 아닌가요?”
민주 : “그럴 리가요. IRP도 엄연한 금융 상품이에요. 은권 씨 은행앱 좀 한번 같이 봐요.
(잠시 후) 어머, 은권 씨는 정기예금에 100% 가입되어 있네요? 저는 미국 ETF 70%, 나머지 30%는 TDF로 굴리고 있어요.”
은권 씨는 그제야 1년 전 은행원이 어떤 상품에 투자할지 물었을 때, 원금손실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달라"라고 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은퇴할 때까지는 많이 남았기 때문에 조금은 공격적인 상품으로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며칠 뒤, 은권 씨는 민주 씨를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마주쳤다.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주 씨 표정이 평소와 달리 밝지 않았다. 은권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권 : “민주 씨, 요즘 미국장 좋다더니… 표정이 왜 그래요?”
민주 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IRP 계좌 수익률이 지난번에 보여줬을 때보다 눈에 띄게 내려가 있었다.
민주 : “미국시장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이번 달은 좀 흔들렸어요.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투자비율을 등록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민주 씨도 처음엔 담담한 척했지만, 평가금액 숫자가 계속 빠지는 걸 보고는 하루에 몇 번씩 앱을 열어보게 됐다고 했다. 회의 중에도, 집에 와서도, 자기 전에도 말이다.
민주 : “이상하죠? 분명 제가 선택한 건데, 막상 손실이 나니까 ‘처음부터 그냥 예금처럼 보수적으로 놔둘 걸 그랬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원 : “그래서요? 바로 다른 상품으로 변경할 건가요? ”
민주 : “(웃으며)그래서 아무것도 안 바꿨어요. 단기간 불안하다고 바로 바꾸는 게 더 위험하다는 것도 알거든요. 대신 지금 등록한 비중이 왜 이렇게 돼 있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 봤어요. 그리고 내 투자성향에 맞는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인지 아니면 지나친 욕심이었는지요.”
고객과의 상담을 통해 에세이로 재구성해봤다. 우리의 주인공 은권 씨는 왜 1년 동안 세금 혜택에는 환호하면서도, 정작 자기 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을까? 단순히 금융 지식이 부족해서였을까?
사실 그 이면에는 우리가 '내 돈의 주도권'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아주 깊은 심리학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나은권 씨가 정기예금 100%라는 안전한 성벽 뒤로 숨어버린 이유는 단순히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라, 막연한 '공포' 때문이다.
이제 나은권 씨의 당혹감을 바탕으로, 우리가 왜 퇴직연금 앞에서 본능적으로 무력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 공포를 확신으로 바꿀 제도적 안전장치들은 무엇인지 다음 장에서 파헤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