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퇴직에 진심

by 나은권

앞에서 우리는 퇴직연금을 구성하고 있는 DB, DC 그리고 IRP에 대해 살펴봤다.


우선 DB는 크루즈컨트롤을 이용해서 편안하고 일정하게 목적지로 향하는 차에 비유할 수 있다. 회사가 전적으로 퇴직금 재원을 운용하고 있으므로 내가 퇴직 때 받는 금액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말하자면 크루즈컨트롤뿐만 아니라 운전대를 회사가 잡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 DC/IRP는 전혀 다르다. 사용자가 직접 기어도 넣고, 속도를 조절하고, 깜빡이도 적극적으로 켜는 매뉴얼모드에 가깝다. 물론 운전대도 온전히 근로자가 잡고 있다. 내가 잘 아는 길을 선택해서 운전할 수도 있고 차선 변경도 곁들이며 노후라는 목적지로 더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점이 있다. 뒷좌석에 앉아 편해만 보이는 DB 가입자도 그리고 자기 뜻대로 직접 운전하는 DC/IRP 가입자도 서로 다른 이유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내 삶의 결과가 나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내적 통제’와, 환경이나 타인, 사회제도에 의해 좌우된다고 느끼면 ‘외적 통제’ 상태에 있다.


바로 앞장에서 은권 씨가 계좌를 만들 때 느끼는 막연함과, 민주 씨가 손실이 났을 때 계좌를 열어 수익률을 확인하며 느끼는 불안감은 사실 이 통제권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시작된다.




1. DB의 공포 : 리무진 뒷좌석의 무력감

회사가 운전하는 리무진(DB)에 탄 사람들은 평소에는 평온하다. 속도가 안정적이고 목적지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임금이 동결될 때, 문득 이런 공포가 찾아온다. “회사가 나중에 내 퇴직금을 줄 돈이 없으면 어떡하지? 실제 금고는 비어있는 거 아냐?”


법적으로 DB형은 근로자들이 퇴직할 때 지급해야 할 총금액(퇴직급여추계액)의 100%를 반드시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야 한다. 하지만 경영 상황에 따라 이 적립률이 미달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때 뒷좌석에 앉은 근로자는 내 노후가 회사의 자금 사정에 휘둘린다는 극심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내 삶의 중요한 가치가 회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외적 통제 소재가 공포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2. DC/IRP의 공포 : 초보 운전자의 고속도로 진입

반대로 직접 핸들을 잡은 DC형 가입자들은 다른 종류의 공포를 느낀다. “운전을 하긴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여기서 손실이 나면 전부 내 책임 아닌가”


‘내적 통제 소재’를 선택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유는 오히려 방치보다 더 큰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핸들을 잡고도 겁이 나서 아예 차를 갓길에 세워두곤 한다. 또한 상당수의 가입자가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수익률 0%에 가까운 원리금 보장 상품에 돈을 묵혀두는 이유가 바로 이 '결정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통제권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불안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

다행히 법은 우리가 어떤 퇴직연금 주머니를 찼든, 그 불안을 완화할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1. DB형: 회사가 졸지 못하게 하는 '감시 장치'

재정안정화계획서 : 회사의 재정상황과 무관하게 근로자의 퇴직급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다. 회사가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한 금액이 근로자들이 퇴직할 때 지급해야 할 총금액(퇴직급여추계액)의 100%에 미달하면 회사는 이를 어떻게 채울지 재정안정화계획서를 수립해야 한다. 재정안정화계획서는 매 사업연도말 결산 후에 작성해야 하며 이를 근로자 대표에게 통보해야 한다. 이 계획서에는 부족한 금액, 해소 목표기간, 연도별 적립 계획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만약 회사가 이 계획을 이행하지 않으면 최대 1,0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기름이 부족하면 즉시 주유소로 가라고 하고 운전 중 졸지 않게 법이 흔들어 깨우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개별 근로자가 회사 전체의 재정안정화계획서를 직접 열람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금융기관에서 발송하는 '가입자 운용현황 통지서'를 통해 우리 회사의 적립 비율이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IPS(Investmen Policy Statement, 적립금운용계획서): 일정 규모 이상(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이라면 회사는 의무적으로 적립금운용위원회를 열고 IPS(적립금운용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DB 적립금을 어떻게 운용할지 미리 정해둔 공식 계획서라고 할 수 있다. 해당 계획서에는 운용목표, 자산배분 원칙, 허용된 상품 범위 등을 담고 있어 무리한 투자 및 임의 운용을 제어할 수 있다.


2. DC/IRP형: 초보 운전자를 위한 '자율주행 장치'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이는 근로자가 투자한 상품 중 만기가 도래했을 때 별도의 운용지시를 하지 않은 경우 사전에 지정된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운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다소 어렵지만.. 근로자가 직접 운전하는 게 너무 겁나서 아무 결정도 못 할 때, 미리 지정해 둔 방법으로 돈이 알아서 굴러가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핸들을 놓아버려도 차가 갓길에 멈춰 서지 않도록 돕는 자율주행 모드와 같다.

위험자산투자한도 : DC/IRP 계좌의 적립금 중 최대 70%까지만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는 규제사항이다. 여기서 위험자산이랑 주식형 펀드, ETF 등 원금손실이 날 수 있는 자산을 의미한다. 나머지 30%는 예금이나 채권형 펀드 등 안전자산으로 채워야 한다. 근로자에게 투자에 대한 자유를 주지만 과도한 변동성은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입자 교육 의무: 퇴직연금을 도입한 회사는 매년 1회 이상 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가입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금융회사에서는 퇴직연금전문가가 직접 찾아가 퇴직연금 운용구조와 상품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니 DC/IRP에 대한 숙련도를 높히기 위해 적극 활용하는 것이 좋다. 참고로 가입자 교육은 의무사항으로 미실시 할 경우 회사에 최대 1,0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공포를 이기는 법: 핸들에 손을 얹어라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 통제권을 회피하지 않고 핸들을 잡는 법을 조금씩 익히는 것이다.

DB형 가입자라면 회사가 다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생각은 버리고 회사가 우리 돈을 얼마나 성실히 쌓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자. 적립률이 낮다면 회사가 '재정안정화계획'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근로자 대표를 통해 물어야 한다. 뒷좌석에 있더라도 운전자가 제대로 운전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이성적인 승객이 되어야 한다.

DC형 가입자라면 차선을 바꾸는 법(상품 교체)을 한 번이라도 시도해 보자. 매년 찾아오는 가입자 교육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퇴직연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투자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기회로 만들어보자.


결국 내 노후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즉 외적 통제에서 내적 통제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불안감은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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