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에 진심
임금피크제는 근로자의 정년을 보장해 주는 대신, 정년 직전 몇 년간 임금을 단계적으로 낮추는 제도다. 회사와 근로자 입장에서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회사 입장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그만큼 근로자들의 임금은 높아지고
고령화로 정년까지 고임금을 계속 지급해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
2. 근로자 입장
정년 전에 퇴직하는 것보다
임금이 줄더라도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낫다.
이 두 이해관계를 절충한 장치가 임금피크제이다. 정년은 지키되 임금은 미리 낮추는 선택이다. 아래 예를 통해 일반적인 구조를 살펴보자.
정년 만 60세, 정년 3년 전 임금피크 시작, 매년 임금이 일정 비율로 감소
매년 임금 : 57세 임금 100%, 58세 90%, 59세 80%, 60세 70%
여기까지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핵심은 이 부분이다.
임금피크제는 ‘월급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DB형 퇴직연금의 미래 퇴직금도 함께 줄어든다.
DB형 퇴직금은 [퇴직 직전 3개월의 평균임금(*) × 근속연수]로 계산한다. 만약 임금피크제가 도입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연봉이 깎인 상태의 [퇴직 직전 3개월의 평균임금(*)] 이 적용된다.
※ 평균임금(*) : 근로자가 퇴직하기 이전 3개월 동안 수령한 임금총액을 그 기간 총일수로 나눈 금액
즉, 지난 20~30년간 쌓아온 황금 같은 시간들이 모두 임금피크제로 깎인 '최근 연봉’ 기준으로 계산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DB형 가입자에게 임금피크제는 ‘재앙’에 가깝다.
DB를 도입한 회사에서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면, 퇴직연금이라는 긴 여정에서 근로자가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다. 바로 지금까지 회사가 운전해 주는 리무진(DB)에서 내려, 직접 운전대(DC)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엔진이 서서히 꺼지고 있는 리무진(DB)을 계속 타고 있는 것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
실생활에서도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과 같이 특별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 한 현재의 상태를 바꾸지 않으려는 게 본능이다. DB에 익숙해진 근로자는 "지금껏 아무 문제없었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앞설 수 있다. 또한 변화 자체가 왠지 손실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임금피크제 구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가장 큰 손실이 될 수 있다.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 : 말 그대로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사결정을 의미한다. 변화 후 얻게 되는 것보다 잃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게 느껴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래 예시를 통해 내 소중한 자산이 얼마나 잔인하게 깎여나가는지 실감해 보자.
- 근로자 A 씨 : 임금피크제 3년 적용, 30년 근속 예정(현재 27년 차), 현재 DB형
- 임금피크제 적용 전 연봉 8,000만 원
- 임금피크제 적용 후 6,400만 원으로 연봉 20% 하락
CASE 1: DB형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귀찮은데 그냥 둘래)
- 퇴직 시점 임금(월 533만 원) × 근속연수 30년 = 약 1억 6,000만 원
- 근속기간 30년 전체기간이 깎인 연봉 기준으로 정산된다.
CASE 2: 임금피크제 직전 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할 경우(내 돈은 내가 지킨다)
- 임금피크제 직전 퇴직금 정산: 당시 임금(월 666만 원) × 27년 = 1억 8,000만 원이며 이 돈은 근로자 A 씨 DC 계좌로 입금됨
- 임금피크제 이후 DC 적립 : 깎인 임금 기준으로 3년분 약 1,600만 원
- 합계: 약 1억 9,600만 원 + @운용 수익
결과적으로 단순히 전환 시점만 맞췄을 뿐인데 퇴직금이 약 3,600만 원 이상 차이 난다. 여기에 3년간의 운용 수익까지 더해진다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임금피크제로 인해 기존 DB에서 DC로 전환을 할 때는 직전까지 퇴직금을 정산하여 근로자 DC 계좌로 입금이 된다. 평소 보지 못했던 목돈이 한꺼번에 DC에 들어오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다음의 세 가지 기본원칙을 우선 기억하자.
안전자산 확보 : 한꺼번에 전액 투자부터 하지 말자. 우선은 안정적 예금이나 채권형 펀드를 고려해 보자. 최근의 불장을 생각하면 다소 괴리가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노후를 위한 자금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면 잃지 않는 전략이 최우선이다. 이를 최소한의 '예비 비상금'이라 생각하고 심리적 안정장치를 확보해 놓자.
분할 매수의 기술 : 한꺼번에 투자형 상품을 매입하는 '몰빵 투자'는 금물이다. 최소한 6~12개월에 걸쳐 나누어 매수하여 시장의 변동성을 방어하는 것이 좋다. 매월 일정금액 자동매수하여 평균단가를 낮추는 것도 시장의 변동성을 이기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TDF : 직접 상품을 고르기 힘들다면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 비중을 알아서 조절해 주는 TDF(Target Date Fund)를 선택해 보자. 이 상품의 특징은 나의 퇴직시점에 가까워질수록 알아서 투자비율을 조정해 주는 것이다. 즉,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주식비중을 축소하고 안정적인 채권자산 중심으로 운용된다.
(TDF 상품 고르는 방법)
지금까지 DB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때의 상황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기존에서 DB가 아닌 DC를 운영하는 업체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때 근로자는 안전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DC형이라 해서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다. 물론 DB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임금이 깎인다고 해서 지난 수십 년간 내 계좌(*)에 차곡차곡 쌓아온 퇴직금 원금이 소급해서 깎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매년 회사가 내 계좌에 넣어주는 부담금(연간 임금 총액의 1/12 이상) 역시 줄어든 연봉에 맞춰 함께 줄어들기 때문이다.
※ 내 계좌(*) : DC는 매년 회사에서 입금하는 금액이 회사가 아닌 근로자 계좌에 쌓인다.
임금피크제라는 구간에 진입했을 때, DB형이 엔진 결함으로 속도가 줄어드는 리무진이라면, DC 가입자는 주행 중에 연료 공급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차가 멈추지는 않겠지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에너지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이 연료 부족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엔진 성능을 튜닝하라 지금까지는 매년 오르는 임금이 반영되어 내 자산의 덩치를 키워주었다. 하지만 임금이 깎이는 시점(임금피크제)부터는 오로지 '수익률'만이 내 자산을 지키는 유일한 엔진이 된다. 내 계좌의 수익률이 최소한 임금 삭감분만큼은 방어해 주어야 은퇴 시점의 최종 자산이 줄어들지 않는다.
2. 추가 연료를 보충하라 회사가 넣어주는 연료가 줄어들었다면, 스스로 연료를 보충해야 한다. IRP 뿐만 아니라 DC에도 본인 부담금 입금이 가능하다. IRP에 제공되는 세제혜택은 동일하므로 DC 계좌에 추가납입을 활용해 보자.
3. 심리적 가드레일을 설치하라 연봉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축된다. 이 때문에 소중한 자산을 오로지 예금에만 꽁꽁 묶어두는 우를 범하지 마라. 앞서 배운 TDF나 분할 매수 같은 시스템을 가드레일 삼아, 내 감정이 아닌 시스템에 따라 투자될 수 있도록 설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