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의 업무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커피를 배우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장님 입장에서야 손님이 적으면 조금 그렇긴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님이 적으면 좋다. 장기적으론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만 일단은 좋다. 더욱이 사장님은 본업이 따로 있으셨고, 본업을 통해 한 건의 계약을 성사시켜 올릴 수 있는 매출이 카페 한 달 매출과 거의 맞먹었기에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엔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이라 공기도 상대적으로 좋았다. 조금 고지대에 카페 건물이 있었기에 탁 트인 시야와 넓게 보이는 전경으로 가끔 카페 밖으로 나와 앞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을 안겨 줬다. 스튜디오 촬영을 위해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돼 있었고, 아기자기한 촬영용 차량도 한 대 주차돼 있었다. 간간히 잔디밭으로 촬영을 하러 내려오는 예비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은근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난 당시엔 결혼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행복을 고까워할 정도로 속이 꼬이진 않았다. 내가 결혼을 안 하는 또는 못 하는 건 내 문제고, 저들의 행복은 그 나름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원한 전경과 푸릇푸릇한 잔디밭 위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카페 업계는 보통 최저시급만 준다. 당시의 최저시급이 기억나진 않지만 일주일에 하루 쉬고, 매일 9시간 정도의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월급이 150만 원이 조금 안 됐다. 나이는 30대 초반을 지나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고, 이렇다 할 기술도 없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수준이 그랬다. 무엇보다 법이 정한 최저시급을 주는데 무슨 더 할 말이 있으랴. 이미 어느 정도 결혼도 포기한 상태고, 좋아하는 커피 배우면서 이렇게 지내는 것도 우선은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이 상황을 지배했다. 물론 잘난 장남이 빌빌 거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앓이를 하는 엄마 입장에서야 속이 문드러졌겠지만 어쩌랴. 이래도 저래도 엄마 입장에서는 역시 잘난 아들이 하는 짓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나 역시 미안하고 죄스럽고 속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장의 내 수준이 그랬으니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 매출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지만 카페도 은근히 매출이 나왔다. 은근히 나오는 매출이라고 해 봐야 재료비와 나에게 줄 인건비를 제하면 정말 얼마나 남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단 만원이라도 이익이 생겼을 것이고 또 사장님 입장에선 스튜디오 한 구석에 카페를 차려 둔 그 자체로 만족하시는 듯했다.
어느 날인가 사장님께서 인센티브를 제안하셨다. 카페 관리 잘해주고 있고, 현재 매월 평균 매출이 이 정도인데 평균 매출을 넘기면 그 부분에 대해서 일정 수수료 율에 의해 급여를 더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고마웠던 점은 그 반대로 평균 매출 밑으로 떨어져도 기본 급여는 깎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최저시급이란 법이 정해 놓은 하한선이 있었지만 인센티브제라는 점을 부각해 얼마든지 반대의 상황에서 급여를 깎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러지 않고, 믿고 맡길 테니 신나게 해 봐라 이 정도의 의미로 인센티브제를 제안했던 것 같다.
기분이 좋았다. 우선 좋아하는 커피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도 책만 보면서 머리로 상상만 하는 공부가 아닌 눈앞에 놓인 모든 도구와 재료로 얼마든지 실습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장님도 오히려 이런 부분을 장려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급여는 최저시급이지만 보장이 됐다. 내 나이에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급여 수준엔 한참 못 미쳤지만 그건 내가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 인센티브라니! 호랑이에 날개를 다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동기부여는 됐다.
그런데 이 동기부여가 결국엔 독이 됐다. 우선 내 성향을 이야기해야겠다. 난 내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조금 강한 편이다. 누가 내 물건을 함부로 하는 걸 견딜 수 없어한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느낌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차를 탔는데 앞뒤 간격이 내 몸에 맞지 않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에 맞게 맞춰 놓은 부분이겠거니 하고 손을 대지 않는다. 다소 불편하지만 계속 타고 다닐 차도 아니기에 그냥 참고 만다. 즉, 소유욕이 물건에 국한하지 않고 공간에도 적용이 된다. 나만의 공간에 누가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이리저리 부대끼다 보니 많이 유해졌지만 30대였던 그때는 이런 성향이 절정이었다.
나에게 전담을 해 준 카페는 어느 순간 주인의식을 넘어 그냥 내 카페가 돼 있었다. 법적으로 내 소유가 아닌 마음 안에 내 소유가 돼 있었다. 카페 운영을 위해 정해 놓은 나름의 규칙들이긴 했지만, 이런 규칙들을 어기면서 들락거리는 스튜디오 직원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뿐만 아니라 내 공간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지만 이를 침범하거나 해를 입히는 대상에게 강력히 대응하진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속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속이 결국은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됐다.
여름에 사장님이 팥빙수를 판매하자고 제안했다. 당연한 제안이다. 우리나라 카페에서 여름에 팥빙수를 판매하지 않는 카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시즌 메뉴고 단가도 높은 편이다. 그래서 카페 사장이라면 누구랄 것 없이 판매하고 싶어 하는 메뉴다. 하지만 내가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이랬다. 우선 우리 카페의 컨셉은 더치커피와 핸드드립 등의 보다 전문화된 커피를 판매한다는 점을 들었다. 두 번째로는 팥빙수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 될 재료가 너무 많았고, 그걸 나 혼자 다 해야 하기에 버겁다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많은 손님이 찾지 않는 카페인데 재료는 재료대로 준비하고 결국엔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버리게 될 거라는 점을 들어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사장님은 몇 번에 걸친 설득을 더 했지만 결국엔 내 결정을 따라 주기로 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직원들과도 은근히 마찰이 일어났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불안이 동반된 불편함. 언제 터져도 터질 그런 불편함이었다. 이런 부분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페 매출은 점점 줄어 갔다. 매출이 조금 나왔을 때도 그렇게 큰 이익이 나서라기 보단 그저 스튜디오에 예쁜 카페 하나 꾸며 놓은 정도의 만족감이 더 컸던 그런 카페였다. 그런데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몇만 원이라도 이익이 안 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사장님은 스튜디오를 몇십 년간 운영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발생하는 손해가 손톱만큼이라고 해도 계속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 사장님이 따로 나가 밥을 먹자고 했다. 그날 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물론 저녁 먹는 시간이 심각하진 않았다. 무슨 이유로 따로 저녁을 먹자고 하는지는 알았지만 저녁을 먹을 때엔 저녁 먹는 것과 일상 이야기에 집중했다.
저녁을 다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시자고 다른 카페에 갔다.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카페를 정리하신다는 것이었다. 예상한 이야기지만 직접 듣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매출이 점점 떨어져서 더 이상 할 의미를 못 느끼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고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감사하게도 나란 존재가 초래한 불편함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원망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물어보셨다. 여기 정리하면 또 커피 할 거냐고.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럼 다른 자리 구해 보겠냐고 하시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만두고 바로 다른 카페 일을 찾을 수도 없는 것이고, 적은 돈이지만 들어오던 급여도 끊길 판이었다. 다음으로 일 할 카페는 더 찾기 힘들 거라는 예상이 됐다. 카페 근무 경력이 생겼지만 나이가 더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사장님의 빛과 같은 말 한마디. 다음에 일 할 카페 찾을 때까지 급여 그대로 줄 테니 일하면서 다음 카페 일 찾으라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그냥 나 왔다.
물론 1년 넘게 일 했으니 최저시급을 받는 알바 형태의 일을 했다고 해도 퇴직금은 줘야 된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더더욱 알바 따위에게 퇴직금을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런 퇴직금은 아니지만 몇 개월이 걸릴지도 모를 상황에서 다음 일자리 찾을 때까지 급여 줄 테니 일 계속하라는 제안은 당시의 나에겐 퇴직금보다 더 고마운 조건이었다. 너무나도 죄송스럽고 고마운 제안을 받는 자리였지만 마시던 커피는 어쩔 수 없이 상당히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