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생각보다 성실한 성향의 사람이어서 이 전에도 매장관리는 빠짐없이 잘해 왔다. 더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선사해 준 사장님의 배려가 감사해 관리하는 데 더 집중했다. 떠나기 위한 관리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일 할 카페도 찾아봤다. 예상대로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보이고 죄송스러워졌다. 사장님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염치는 있는 사람이기에 내 마음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같이 다음 일자리가 구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답답했다. 그래서 더 관리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답게 정해진 시간을 태우면서 다가왔다. 사장님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일자리는 구했냐고.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솔직한 성격이지만 성격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있고,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있다. 이번엔 후자다. 몇 군데 알아보는 중이고 연락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장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알았다며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선사해 주셨듯이 스스로 끝낼 수 있는 마지막 선택권마저 주셨다. 이제 나가야 된다.
그렇게 나왔다. 사장님은 더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하셨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꼭 우리 스튜디오로 오라는 말씀을 주셨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결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라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백수가 됐다. 이 번엔 타격이 조금 컸다. 당시의 나에게 경제적인 상황은 별로 겁날 게 없었다. 결혼을 포기했기 때문에…. 다만 마음이 조금 시렸다. 2~3년 여 전에 교육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됐을 때는 30대 초반이라는 나이로 인해 걱정은 됐지만, 그럼에도 뭔가 속이 시원한 부분이 있었다. 실로 성인이 된 이후로 거의 처음으로 신나게 놀 수 있는 기회였기에 초반엔 나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힘들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박차고 나와서 잡았던 기회에서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나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좀 그렇긴 한데, 나이 이게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이가 차면서 맞이하는 실패의 경험은 보다 어릴 때의 그것보다 들어오는 고통이 크다. 고통의 크기는 나이에 정비례하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 같다. 더욱이 이번엔 그냥 마냥 좋다고 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커피로 끝을 봐야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되어 주었다. 열심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카페 일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면 우선 사장님들이 조금 놀랐다. 나이는 이력서에 나와 있으니 감안하고 마음의 준비(?) 같은 걸 하고 있는데, 복장에서 보통 놀랐다. 조금 늦은 나이지만 커피에 모든 걸 걸고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 내 이야기고, 현실적으로 카페의 사장님들은 알바를 찾을 뿐이었다. 내 나이가 조금 있으니 그래도 나와 면접을 보겠다고 하는 분들은 조금 책임감이 있는 알바를 찾을 뿐이었다. 여하튼 알바를 뽑는 면접 자리다. 그래서 대부분의 면접대상자들은 예의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면접에 임했던 듯하다. 하지만 난 그쪽에서 알바를, 조금 믿음직한 알바를 찾는다 해도 남은 내 삶을 걸어 볼 일이었기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면접을 봤다. 그리고 알바지만 면접 자체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사장님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은 줬지만, 뽑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이 많은 부분 감내하고 어린 선배라 할지라도 일 잘 배우겠다고 하는 건 내 다짐일 뿐, 그쪽 조직에 부담을 주는 건 사실이었다. 이미 겪을 대로 겪은 상황이었지만, 영 마음이 쓰렸다.
이런 와중에 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아 약간은 방향을 틀어 레스토랑에서 일을 아주 잠깐 하게 됐다. 말 그대로 레스토랑이었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파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레스토랑이었다. 다만, 손님들에게 후식으로 제공하는 커피를 조금 더 질 좋게 제공하고 싶어 했던 레스토랑이었다. 메인이 아닌 후식을 위한 커피를 만든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현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선, 면접이나 봐 보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사장님의 포부가 생각보다 컸다.
나보다 젊은 사장님이었는데 부모님의 식당을 어렸을 때부터 도와주면서 일찌감치 장사를 본인의 업으로 삼은 분이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사장이란 점이 부럽기도 했고, 남 다른 마인드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레스토랑 하나지만 점포를 더 늘려 궁극적으로는 프랜차이즈화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혹하게 한 부분은 지금은 후식으로 제공할 커피를 만들 사람을 뽑고 있지만 카페도 낼 생각이 있다는 점이었다. 잘만 해주면 카페 매니저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카페 알바 정도면 감사합니다 하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장은 아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카페 매니저가 될 수도 있다는 제안인데 쉽게 물리칠 수가 없었다. 아니 물리치면 안 되는 자리였다.
다음 날, 출근했다. 레스토랑답게 식사시간에 정신이 없었다. 낡았지만 에스프레소 머신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바리스타를 뽑았겠지만 이 부분만 봐도 면접 당시의 이야기가 허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꽤 열성적이었다. 단순히 알바나 직원이 아닌 레스토랑을 함께 키워 가고자 하는 의지들이 엿 보였다. 내가 면접 당시에 느낀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더 신뢰가 갔다. 직원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사장님의 준비된 자세 덕분인지 장사도 꽤나 잘 됐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만뒀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내내 생각했는데 그만둘 때의 느낌만 기억이 날 뿐, 정확히 어떠한 이유로 그만둔 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느낌을 이야기해 본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신뢰라는 측면이 깨졌던 것 같다. 내가 착각이나 오해를 한 건지, 그들의 모습이 거짓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신뢰가 깨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처음 그만둔다고 했을 때, 사장님이 한 두어 번은 잡았던 것 같은데 결국엔 그만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주일 만에 일은 그만둔 점은 죄송스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죄송스럽다고 상황을 참아낼 만큼의 성정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아닌 건 아니니까. 화려한 복귀가 될 뻔했던 레스토랑과의 인연을 그렇게 정리했다. 한 참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간간히 그 레스토랑이 있던 곳을 지나친다. 기억이 맞으면 설계사무실로 바뀌었다가 다시 다른 식당으로 바뀐 듯했다. 그때의 그 느낌, 내가 착각해서 도망친 건지 그들이 거짓된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 모를 그 느낌을 되새기며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뽑던 날을 추억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