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시절로 넘어가 보자. 사실 유아기와 초등시절 기억의 경계가 조금 애매하긴 하다. 특히 초등 저학년까지는 유아기의 기억과 많은 부분 들쭉날쭉 뒤섞여 있다. 유아기의 기억이 거의 없는 것처럼 초등 저학년의 기억도 거의 없다. 실수는 아니고 기억이 나는 일이 있긴 있다. 다니던 초등학교에 수영장이 있었다. 학교 학생들은 방학 때 마음껏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1학년인가 2학년이던 시절 여름방학이 맞을 거다.
여름방학이 돼서 집에서 가까운 학교의 수영장을 이용해 물놀이를 하려 했다. 동생도 같이 데려갔다가 관리인이 학교 학생이 아니라고 해서 동생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동생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던 적이 있다. 오빠가 학교에 다니고 있고 2살 아래인 친동생인데 좀 들여보내 주지? 당시 관리인은 자기 할 일을 한 거지만 인심이 딱히 팍팍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조금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학년 겨울 방학이 되기 전에 아빠가 직장을 다른 동네로 옮겨 이사를 가게 됐다. 살던 곳과 거리가 조금 떨어진 동네로 이사를 간 터라 전학을 가게 됐다. 그 직전의 일로 상당히 명료하게 기억이 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업시간에 담임선생님에게 엉덩이를 ‘빠따’로 맞은 적이 있다. 11월이었을 것이다. 월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냥 엉덩이를 때리면 될 거를 바지까지 벗기고 내복만 입힌 채로 선생님이 때렸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더욱이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그랬다. 그럼에도 수치심이 컸는지 그때의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난 전학을 갔다. 뭐 시간도 한참 지났기에 원망스럽거나 그런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분도 이제 나이가 조금 있으실 텐데 살아 계시려나 모르겠다.
쓰면서 기억을 더듬다 보니 조금씩 생각나는 실수들이 있다. 이번에도 여름방학 때 할머니 집에 가서 한 실수인데 당시엔 적당히 넘어가 주는 분위기였다. 시골 친구들과 여름이라고 멱을 감으러 가는 길에 배가 고팠는지 참외 서리를 해 먹은 일이다. 멱을 다 감고 할머니 집에 돌아와서 그래도 물이 더러울 수 있으니 할머니가 샘에서 다시 몸을 씻겨주었다. 밥을 안 먹였는데 배가 왜 이리 볼록 나왔냐 물어보시기에 친구들하고 참외 서리해 먹었다고 했다. 밭주인들이 아직은 대충 넘어가 주지만 그래도 다시 하지 말라고 배고픈 시절이야 이해하고 넘어가 줬지만 이제 도둑질이라고 해서 알겠다고 한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역시 여름이야기인데 이번엔 아빠 직장동료들과 가족동반으로 계곡으로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어른들은 천막이며 고기, 야채 등등 챙겨 온 것들을 내리는 동안 아이들은 신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다가 어른들이 고기 구어 놨다고 와서 먹으라고 하면 달려가 고기도 먹고 수박도 먹고 그랬다. 그러다 처 놓은 텐트의 줄을 보지 못하고 엎어져 그만 발톱이 홀랑 빠진 적이 있다. 아파 죽는다고 울었고 아마 기억에 그날 가족동반 물놀이는 그 길로 끝이 났을 거다.
그리고 한 번은 정말 멍청이 같은 실수라고 하면 어감이 조금 약하고 짓거리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커다란 못을 발로 밟은 적이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상황이 벌어진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각목 같은 것에 박혀 있던 커다란 못을 보고 발로 ‘콱’하고 밟으면 뭔가 상황이 정리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 속에 그냥 냅다 못을 밟아 버렸다. 당연하게도 못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내 신발을 뚫고 발바닥을 뚫어 버렸다. 다행히(?) 발등까지 뚫고 나오진 않았다. 파상풍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을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실수도 있고, 역시 어린아이 같이 멍청한 실수도 있었던 시기다. 어느 쪽이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련함이란 느낌을 주는 건 마찬가지다. 사람 삶이라는 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멀리서 바라보는 희극 같은 느낌이 든다. 대략적으로 초등 저학년 시절의 일들이다. 고학년으로 넘어와 보면 실수는 아니고 가장 큰일이 눈 수술을 한 경험이다. 타고나길 조금 문제가 있어 눈 수술을 했고 한 달 동안 눈에 안대를 붙이고 다닌 적이 있다. 그 덕에 지금은 관련된 문제가 거의 없이 생활하고 있다.
역시 실수는 아니고 고학년 전체를 관통하는 경험이 하나 있다. 진로 선택이라고 하는 부분과도 연결이 되는 조금은 거창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실수라기보다는 실재의 선택과 반대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의구심이 간혹 따라붙는 이야기다. 실수를 되짚어 보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불가능한 기대일 것이다. 지금의 삶도 부족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편이다. 그럼에도 그때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종종 하곤 한다.
나는 덩치가 조금 있는 편이다. 수치로 이야기해 보면 키는 181cm에 몸무게는 82kg 정도다. 어느 날 갑자기 큰 건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조금 큰 편이었다. 태어나길 우량아로 태어나 당시에 모 분유회사에서 진행한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가 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만큼 갓난아이 시절부터 덩치가 큰 편이었다. 초등시절에도 마찬가지여서 반에서 학생들 번호를 매길 때 가나다 순서가 아니고 키 순서로 매기면 거의 마지막 번호를 차지했다.
고학년이 되자마자 학교 운동부에서 운동하자고 아주 멋들어지게 표현하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운동을 잘하고 못 하고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또래보다 덩치만 조금 크면 우선 운동을 시켜 보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이니 아무래도 발육 상황이 고르진 못했을 것이고 개중에 덩치가 조금 큰 아이를 선수로 기용하면 보통은 성과가 좋게 나와 운동을 하자고 뽑아 간 기억이 있다. 나 역시 그런 경우라고 보는 편이 맞다.
제일 처음 나를 뽑아 간 운동부는 육상부였다. 육상부는 그래도 나름 전적(?)을 바탕으로 뽑아 갔다. 육상부 활동과 관계없이 초등학교 내내 운동회를 할 때마다 반대표 혹은 청군, 백군 대표로 계주 선수로 출전했다. 이런 화려한 전적을 바탕으로 육상부에 스카우트가 됐는데 운동부로서 운동을 조금 해 보려고 하면 엄마가 운동은 안 된다고 빼 내오곤 했다. 지금은 변화가 조금 있지만 당시에 운동부가 된 다는 건 철저하게 엘리트 체육이라는 기조 아래 운동을 했다. 다시 말해 운동이 최우선으로서 공부나 성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출석도장만 찍고 바로 연습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당시엔 나도 좋았고 친구들의 부러움도 많이 샀다. 그러데 엄마는 어른답게 걱정이 많았다. 운동을 해서 성공하면 모르겠지만 실패한다면 배운 것도 뭐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운동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운동으로 성공하면 그만이지만 그게 보통일은 아니다. 확률적으로 보면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것이 종목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운동을 통해 성공하는 것보다 대체적으로 훨씬 쉽다. 엄마가 나를 설득하는 멘트가 보통 이랬다. ‘너 운동하다 실패하면 동네 건달 그러니까 깡패 되는 거야.’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