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이 내 후밴데 2

by 이야기하는 늑대

그렇게 육상부는 한 두어 번 들락날락 반복하면서 선수 생활이랄 것도 없는 경험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덩치는 어디 안 갔고 축구부였던 친구가 나를 축부구에 추천했다. 나는 역시 엄마가 뭐라고 하든 말든 수업을 빠질 수 있고, 또 한 가지 우유와 빵을 무상으로 줬기 때문에 다시 운동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 도시락은 싸 와야 했지만 간식은 급식을 했다.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우유와 빵을 원하는 학생에 한해 학교에서 돈을 받고 급식을 했다. 운동부가 되면 우유와 빵을 무상으로 그것도 1인당 보통 2~3개씩 먹을 수 있었다. 식탐이 있던 나는 돈도 안 내고 한 개도 아닌 2~3개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친구 따라 축구부 감독님을 만났고 덩치는 그만하면 됐으니 공 한 번 차보라 했다. 시원하게 찼더니 내일부터 운동하러 나오라 해서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축구부 활동은 꽤 오래 했다. 육상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엄마는 반대를 했다. 역시 나를 축구부에서 빼 내오려 했지만 달리기만 했던 육상부보다는 공놀이를 하는 축구부가 재미있었는지 이번엔 내가 버텼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렇게 축구부 활동을 시작했다.



공 한 번 차고 축구부원이 됐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교함은 부족하다는 것을 감독님은 바로 확인했다. 그럼에도 직전 운동부인 육상부에 뽑힌 나름의 이유에 힘입어 치고 달리는 부분은 어느 정도 인정이 됐다. 더불어서 덩치가 있는 점을 감안해 수비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최종 스위퍼라는 위치를 맡았다. 지금은 아마 센터백으로 더 많이 불리는 자리일 것이다. 우리 국가대표로 따지면 2002년 시절의 홍명보 선수 자리가 아마 맞을 것이다.



수비수 생활을 하다 축구부원 중에 덩치가 가장 좋았는지 어느 날 감독님이 골키퍼 한 번 해보자 해서 포지션을 바꿔 골키퍼 연습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훈련을 하고 연습 경기에 골키퍼로 투입이 됐는데 골을 무진장 많이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골키퍼는 잘리고 다시 원래 수비 자리로 돌아갔다. 수비수 역할은 꽤 잘했던 것 같다. 수비수도 역시 기술적인 측면이 필요하지만 치고 들어오는 상대팀의 공격수를 우선 몸으로 막아내는 경우가 더 많다 보니 그 역할은 나름 잘 수행한 것 같다.



수비수의 기술적인 측면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수비수도 몸으로 어떻게 막을 건지 태클은 어느 시점에 들어가야 하는지 등 기술적인 부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공을 잡은 선수 자체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간도 볼 줄 알아야 한다. 필요에 의해선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진영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체력과 전략적인 시야가 필요한 포지션이기도 하다. 다만 당시에 적당히 덩치가 있는 몸으로 특별한 심사과정 없이 공 한 번 차고 축구부원이 된 나에게 요구되는 건 딱 몸으로 막아내는 그 정도였고 나름 잘 수행했다 뭐 그런 이야기다.



도에서 진행한 소년체전 동메달까지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꽤 오래간 열심히 축구부 활동을 했다. 비가 오던 3,4위전 경기에서 태클을 들어가다 허벅지에 상처가 크게 났는데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 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럼에도 학년이 바뀌고 중학교 진학이 가까워짐에 따라 엄마의 반대는 강했고 결국엔 축구부 활동을 그만두게 됐다. 그렇게 운동부 생활은 끝이 나나 싶었는데 6학년 때 축구부에서 중요한 전국대회가 있는데 선수가 부족하다고 한 번만 같이 뛰자고 해서 특별(?) 기용을 통해 전국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잡혀 있는 일정이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첫 경기가 수요일에 있는데 월요일부터 서울에 올라가 적응훈련을 하는 그런 일정이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3일간 학교 수업을 빠지는 일정이었다. 월요일부터 서울에 올라가 다른 축구부 친구들과 숙소 생활하면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처음 이틀간 즐겁게 연습을 하고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첫 경기를 뛰게 됐다. 전국대회라 그런지 구장도 잔디구장이었다. 잔디구장은 흙바닥에서 뛰는 경기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을 줬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니 몸이 너무 힘들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다가 나간 경기가 아니라 그런지 전반 막바지에 이르니 호흡이 딸리고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나 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경기는 졌다. 앞선 이틀간 신나게 놀고(?) 3일째 되는 날 첫 경기를 지고 우리는 짐을 싸 내려왔다. 그 후로도 자연스럽게 축구부 활동을 계속 이어서 하게 됐다.



이제 졸업을 앞둔 시점이 됐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걸 알았는지 엄마는 서울에 다녀온 이후에 축구부 활동을 그렇게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중학교 진학해서 공부를 할 건지, 축구를 계속할 건지 결정하면 됐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주소지에 맞춰 해당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될 것이고, 축구를 하겠다고 하면 축구부가 있는 지정된 중학교에 진학을 하는 것이었다.



고민은 조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축구실력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공부를 하는 쪽으로 선택을 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었다. 중학교 진학해서 공부를 곧 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잘한 공부가 내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과 결과를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내내 성적이 거의 최상위권에 속해 있었으니 상당히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육상부와 축구부 생활을 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도 기본적으로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다. 공부를 잘하는데 덩치도 좋아 상대적으로 운동도 잘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만약에 축구를 계속 하겠다고 선택을 했고, 만약에 만약에 정말 만약에 축구선수로 성공을 했다면 안정환 선수 거의 바로 밑에 후배였을 것이고 박지성 선수 바로 위 선배 정도 연배가 됐을 거다. 최근에 세계 최고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 선수에겐 나름 대선배가 됐을 그런 연배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지만 당시 내 축구실력과 노력 등을 고려했을 때 안정환 선수의 후배가 되고, 박지성 선수의 선배가 되고, 손흥민 선수의 대선배가 될 수 있을 만한 축구선수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했을 것이다.



당시에 같이 축구부 활동을 하던 친구들 중에 축구를 정말 꽤 잘한다고 했던 그래서 중학교 진학도 축구를 계속 하겠다고 선택한 친구들 중에 이름을 알린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 축구를 축구답게 한다고 했던 친구들도 그 정도인데 나라고 달랐을까? 아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정말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런데 또 세상일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고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마 그때 축구를 계속 하겠다고 선택했어도 성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뭐 대단한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런 핀잔 얼마든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이는 게 맞다. 다만 그냥 혹시나 하는 막연한 상상이라고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왜 이런 표현 있지 않나? ‘상상의 나래’ 그렇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봤을 때 혹시라도 내가 정말 성공했다면 지금 너무나도 유명한 손흥민 선수의 선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분 좋은 상상을 가끔 할 때가 있어 그때 선택을 달리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공부를 하겠다고 선택한 이후에도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 6년 내내 체육대회에 반대표로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로 출전했다. 그조차도 열심히 해서 농구하다 무릎 옆에 입은 상처의 흉터도 역시 아직 남아 있다. 어린 시절에 들고 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운동부로 활동한 부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손흥민 선수가 너무 좋고, 또 성공에 이른 과정이 너무 존경스럽기에 한때나마 축구를 조금 했던 경험을 연결시켜 봤을 뿐이다. 그러니 격한 욕은 자제를 부탁드리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