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정형수술 1

by 이야기하는 늑대

앞에 글에도 어느 정도 나왔지만 공부를 하겠다고 진학한 중학교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선택에 걸맞게 공부를 잘했다. 지금은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1부터 중3까지 영재반이라고 해서 전교 5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에 따로 공부를 시켰다. 지금의 전교 50등과 당시의 전교 50등은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당시에는 한 반에 45~5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고 한 학년이 최소한 10개 반 혹은 12개 반 정도였다. 실제로 같은 학교 한 학년에 17반까지 있는 걸 본 적도 있다.



여담이지만 오전반, 오후반이라는 걸 요즘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초등시절(난 국민학교 출신이다.) 학생은 많은데 교실이 부족해 초등 저학년들은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수업을 받았다. 무슨 공장 2교대 직원들도 아닌데 일부는 오전에 나머지는 오후에 같은 교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교실을 활용했다. 그때의 초등학교들이 지금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을 건데 아마 지금은 교실이 남아돌아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초등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자꾸 옆으로 새는데 졸업한 초등학교가 1900년대 초반에 개교한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아픈 근현대사를 다 겪은 학교였다. 처음 다니던 학교에서 전학을 가 2학년 말부터 다닌 학교였는데 전학을 처음 갔을 때 학교 벽면의 총알 자국을 잊을 수가 없었다.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6.25 전쟁의 총알 자국이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어린 당시에는 우와! 이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전쟁 이후로 30년이 조금 넘게 흘렀을 때인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총알 자국을 그냥 두고 보수를 하지 않은 게 말이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여하튼 그 정도로 오래된 학교를 졸업했고 당시에 많은 학생들에 의해 반을 나눠 수업한 기억들이 같이 엮여 기억이 났을 뿐이다.(나이가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들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에헴~ 라떼는 말이야….)



지금에 비하면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이 정말 말 그대로 왁자지껄한 중학교 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공부를 잘했고 학교에서 운영하는 영재반, 그래 맞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 고등학교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학사와 비슷한 거 같다. 그런 학생이었으니 선생님들의 시선도 고왔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 중학교 1학년의 시간은 그렇게 공부를 하겠다는 선택이 맞았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즐겁게 보낸 것 같다. 사실 별 다른 특별한 기억은 없다. 이 글의 주제가 실수 혹은 실패를 소환해 내는 건데 그럴 만한 소재가 중학교 1학년 시기엔 없는 것 같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별 다를 건 없었다. 아! 한 가지 변화는 생겼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해 온 축구를 중학교 1학년이 돼서도 계속했다. 물론 선수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쉬는 시간 혹은 여가 시간에 여느 남학생들이 그렇듯 축구를 했다. 서당 개도 3년 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어찌 됐든 초등 시절에 축구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했다. 그 ‘짬바’는 어디 가지 않았다. 중학교 친구들과 재미 삼아하는 축구에서도 항상 주전급으로 기용(?)이 됐다. 체육대회에서 반대표로 나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내가 2학년이 되면서 초등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농구를 배우게 됐다.



운동이라는 근본은 같지만 이게 또 축구와는 전혀 다른 운동이다. 다들 알겠지만 축구는 손을 제외하고 모두 쓸 수 있다. 그에 반해 농구는 손만 써야 되는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근본, 조금 더 엮어 본다면 구기종목이라는 카테고리 정도를 제외하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는 게 축구와 농구다. 축구는 어느 정도 했지만 농구는 완전 초보였다. 그런 나를 그 친구가 나름 열심히 가르쳐 줬다. 꽤 잘 가르쳐 줬고, 또 곧잘 따라 했는지 2학년부터 내 주 종목은 축구에서 농구로 바뀌게 됐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하는 운동도 농구가 됐고, 체육대회에서도 농구대표로 나가게 됐다.



어쩌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그러니까 1990년대 초중반의 농구 인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아마 우리나라 농구의 최전성기가 아닐까 한다. 우선 해외로 눈을 돌리면 ‘시카고 불스’가 NBA를 호령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시카고 불스는 누가 이끌었느냐? 그 유명한 ‘마이클 조던’이다. 뿐만 아니라 ‘스카티 피펜’, ‘찰스 바클리’, '데니스 로드맨' 등등등 이 외에도 엄청난 스타들이 있었다. 내가 나름 좋아했고 지금 기억나는 선수만 이 정도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케이블 TV도 시청하는 집이 많지 않던 시절, espn에서 해 주는 NBA 한 번 보겠다고 여기저기 시청 가능한 친구 집을 정말 많이 기웃거렸던 것 같다. 그때 주변 친구들 중에 축구 보는 친구가 있었나 싶다. 그만큼 NBA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아이들은 농구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모두 농구화를 유행처럼 신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에어 조던'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의 어깨는 그야말로 백두산 급이었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농구대잔치'를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팀과 실업팀이 함께 붙었던 대회였다. 연대, 고대, 문경은, 서장훈, 현주엽, 우지원, 이상민, 전희철 그리고 기아의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 등등등 그야말로 대한민국 농구의 초초 전성기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의 인기는 그런 농구 인기에 기름을 부었다.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윤대협, 북산고, 산왕고 등등등. 이런 농구 인기의 정점을 찍듯이 농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까지 나와 버렸다.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마지막 승부'의 인기는 당시 농구의 인기를 그대로 반영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장동건, 손지창, 심은하 크흐~ 심은하가 연기한 '다슬이'의 그 순수한 모습을 당시의 남학생들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초등시절부터 원래 친했던 친구에게 특별히 농구를 배우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됐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시대적 상황이 농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친구와 한 반이 되면서 농구를 해 왔던 친구와 보다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농구를 접하게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기억에 의하면 나도 키가 작지 않지만 그 친구는 나보다 키가 더 컸다. 모든 운동이 키가 크면 좋지만 농구나 배구는 특히 더 그렇다. 나보다 큰 녀석이 농구공을 들고 알짱거리니 여간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도 그렇지만 이제 축구선수도 아닌데 꼭 축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농구도 한 번 배워 보자 했던 것 같다. 더욱이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 가르쳐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 친구와는 농구를 같이 하면서 더 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