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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Jan 10. 2023

2022년 3월 마음정산

 3월이다. 봄이다. 초봄이다. 봄이지만 아직은 춥다. 실제로 3월에 눈이 오는 경우도 많다. 몇 학년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학교 시절에 1학기 개강하고 1주 정도 뒤인가 주말에 PC방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침 눈이 많이 왔다. 눈이 많이 오나 보다 3월인데 이제 봄인데 아직도 오네 이런 생각을 하며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그때 친구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 눈이 많이 와 쌓인 눈으로 인해 창고 무너질 거 같다고 빨리 와서 창고 좀 기둥으로 받치라고… 게임하다 말고 부랴부랴 달려갔던 기억도 난다. 3월에 내리는 눈이 이렇게 무섭다. 지난해 3월엔 눈이 좀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번 겨울은 현재까지 눈이 많이 왔는데 다가오는 3월엔 어떨지 모르겠다.



 친구 아버님이 창고 무너진다고 오라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던 20대 때 어금니 하나가 깨졌다. 기억에 의하면 삼겹살을 먹다 오도독뼈를 잘못 씹어 깨진 거 같다. 확실하지 않지만 깨진 어금니가 이전부터 조금 문제였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이전에 조금 문제가 있었던 기분 같은 기억과 20대 때 삼겹살을 먹다 깨진 경험이 혼재했다.



 치과에 가진 않았다. 다들 알지 않는가? 치과는 무서운 곳이란 걸… 그 소리, 입 안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곳이기에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할 수 없는 두려움, 더해서 입만 마취가 돼 말똥말똥한 정신은 오히려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곳. 가급적이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중요하지 않은 이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어금니가 깨졌는데 치과가 오죽 무서웠으면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웃긴 건 그렇게 어금니가 깨진 채로 근 20여 년을 버텼다.



 3조각 정도로 깨졌는데 각 조각의 뿌리 부분은 잇몸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깨진 3조각을 퍼즐 맞추듯이 혀로 놀려가며 얼마 전까지 나름 잘 써 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3조각 중에 한 조각은 결국 떨어져 나갔다. 그 이후로 2조각만 남은 채로 꽤 오랫동안 버텼다. 그러다 재작년 가을 즈음에 한 조각이 마저 떨어져 나갔다. 이때도 조금 딱딱한 초코볼을 와그작 씹어 먹다 삭을 대로 삭은 한 조각이 깨지면서 떨어져 나갔다.



 순간 쭈뼛 신경이 곤두섰다.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제 남은 조각은 한 조각, 어금니로서의 역할수행이 어려워질 거 같았다. 더 나아가 치과를 가는 게 무서운 이유는 아픈 것도 있지만 진료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20대 때는 그저 무서웠지만 40대가 돼서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과 치료를 위해 생각지 못한 돈을 써야 된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맛있는 고기를 먹는 데 불편할 거라는 생각과 반대편 어금니로만 씹어 먹으면 그쪽 어금니도 오래가지 못해 더 큰 사달이 날 거 같은 생각에 치과를 가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맛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는가?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남아 있는 조각을 보아 아니 분위기상 임플란트를 해야 될 거 같았다. 그래도 치과를 잘 찾아가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임플란트를 권유하지 않고 최대한 원래 치아를 살려준다는 기대를 품고 폭풍검색을 해서 한 치과를 찾아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눕기도 싫은 치과 진료 의자에 누워 진료를 받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이가 깨진 것보다 별일 없길 바란 기대가 깨진 게 더 아팠다. 어금니를 본 의사는 이건 안 된다고 이건 살릴 수 없다고 더 볼 필요도 없다고 아주 확고하게 진단을 내렸다. 그래도 혹시 가능한 부분이 없지 않을까 하는 애처로운 고양이 눈으로 의사를 바라봤지만 의사의 표정은 단호했고 내가 호구일 수도 있지만 그 표정엔 진솔함이 묻어났다.



 진료 의자에서 내려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상담사를 따라 터벅터벅 상담실로 걸어갔다.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임플란트를 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고 어느 회사의 제품으로 할 건지만 결정하면 되는 문제였다. 제시된 3가지의 가격대에서 가장 비싼 가격대의 제품이 공교롭게도(의도된 걸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거의 확실할 것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브랜드였다. 설명을 들어 보니 이름값은 괜히 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의 설명이었다. 가장 많이 팔렸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경우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떤 제품으로 할지 거의 결정한 걸 직감했는지 그 보다 저렴한 다른 회사의 제품들도 성심성의껏 장점을 설명해 줬다. 이 부분이 마케팅 포인트라면 조금 배워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제시된 제품 중에 가장 비싼 브랜드를 선택했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격하게 나진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제품을 결정하고 나서 추후 진료 및 수술, 치료 일정 등을 잡았다. 치과를 나오면서 드디어 나도 임플란트를 하는구나 싶었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어금니 하나 임플란트 하는 거면 선방한 건가 싶으면서도 미리 신경 써 관리했다면 조금 더 내 이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의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지나고 나서 말이지만 임플란트를 하길 잘했다. 내 이는 아니기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고기를 충분히 맛있게 잘 먹고 있다. 처음엔 맨들맨들해서 그 어색함을 혀로 계속 확인했는데 이제 그런 어색함도 거의 사라졌다.



 임플란트를 하면서 추가적으로 역시 미루고 미뤘던 치과 진료를 마저 받았다. 꿋꿋하게 버텼는데 의사의 권유를 결국 외면할 수 없었다. 처음 권유를 외면했고 두 번째, 세 번째도 외면했다. 의사는 임플란트 관련 진료 일정 내내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도 한 고집하기에 임플란트를 해서 넣고 이제 다 됐습니다 할 때까지 버텼다. 그렇게 한 참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치아가 아파오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외면한 의사의 권유를 확인하러 치과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권유는 ‘사랑니 발치’였다. 역시 흐릿한 기억에 의하면 고등시절 아니면 20대 초반 어느 여름날, 골목길을 걸어가다 사랑니가 아파오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전부터 아팠는지 그날 유독 아팠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정확한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사랑니 하면 나도 모르게 확실하지 않은 그날의 골목길에서의 아픔이 떠오른다. 그리곤 사랑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통증을 잘 참는 편이어서 아픈데도 참아온 걸 수도 있다.



 사랑니가 3개인데 모두 빼자는 의사의 권유가 처음엔 너무 무서웠고 뭐랄까 아무리 사랑니라지만 그렇게 다 빼도 되는 걸까 싶었다. 음식물이 끼고 칫솔이 잘 닿지도 않고 결국엔 썩을 거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랑니 앞의 어금니에 부담을 준다고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음식물이 껴서 불편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플란트 이후에 다시 치과를 찾은 이유는 통증 때문이었다. 사실 그 정도 통증은 예전 같으면 그냥 넘겼을 건데 임플란트까지 한 마당에 뭘 못하겠나 싶었고 이 참에 치아 건강을 위해 정리를 해 보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3개 중에 하나는 크기도 작고 바르게 자라고 있어 뽑는 줄도 모르게 뽑혔고 또 하나는 평이하게 뽑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누워 있어서 사랑니발치에 대한 여기저기 떠도는 거의 괴담 수준과 같은 경우였다. 실력이 좋은 선생님이었는지 열심히 잇몸을 째고 사랑니를 부수고 해서 여차저차 뺐는데 들었던 이야기에 비해선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았다.



 임플란트부터 시작해 사랑니 발치까지 근 반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프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고 임플란트를 위해 남아 있는 어금니를 뽑은 날 치과에서 준 죽도 맛있게 먹었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치과 진료 자체에 대한 공포나 통증이 아니었고 미련스럽게 미루고 미룬 관리의 부재에 의해 큰돈이 나간 부분이었다. 진료를 받기 시작해 마무리해 가는 내내 미리 좀 신경 쓸 걸, 미리 좀 관리할 걸 하는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리 신경 쓰고 관리한다고 해서 시간과 돈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간격을 두고 지속적으로 천 원씩 10번 쓰는 것과 갑자기 뒤통수 맞듯이 만 원을 빼앗기는 정도의 차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날 텐데 조금이라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내가 먼저 나서 받아들이면 더 좋겠다 뭐 대충 이런 낯간지러운 삶의 지혜 비스무리한 걸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https://groro.co.kr/story/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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