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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Mar 23. 2023

봄을 보는 길

 차를 보통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는 편이었다. 조금 늦게 끝나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지상엔 주차할 자리가 거의 없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들은 지상에 보통 주차공간이 없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어진 지 조금 된 아파트라 지상에도 주차공간이 상당히 있다. 공간은 상당히 있지만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시간 또한 상당히 늦기에 보통은 지상의 자리가 다 찬다. 그래서 보통 지하에 주차를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시대 변화에 발맞춰 지하에 전기차 충전 구역이 많이 생겨 기존의 내연기관차를 주차할 공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에 주차를 하기 위해 한 두 바퀴 돌면서 자리를 찾았는데 점점 귀찮아졌고 스멀스멀 짜증이 밀려올라 왔다. 빙글빙글 돌다 자리가 없어 별 수 없이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면 아파트 건물 전면 주차장이 아닌 후면 주차장 쪽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럼 또 신기한 게 같은 지상인데 전면에 비해 후면엔 자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



 그 이후로 후면 주차장에 주차를 주로 하게 됐다. 사실 전면이나 후면이나 거리는 거기서 거기였다. 전면 주자창이 아파트 공동 현관과 아무래도 조금 가까웠으나 시간으로 따져 봐도 1~2분 차이였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조금 걷지 뭐 이런 생각으로 후면에 주차를 하게 됐다. 오히려 잘 됐다 싶다. 지하에 주차하면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도 은근히 귀찮았는데 전화위복으로 삼을 만했다.



 후면에 주차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낮에 출근을 할 때 아파트를 끼고돌아 뒤로 걸어가게 됐다. 하루 이틀 별스럽지 않게 걸어갔다. 별스러울 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주차 공간 뒤의 다소 좁은 인도였을 뿐이다. 얼마 전까지 겨울이었기에 더더욱 볼 게 없는 인도를 그야말로 사람이 걸어가기 위한 용도 외에 아무런 쓰임도 없는 인도를 걸어갔다.



 그런데 누가 그러지 않았나. ‘자주 보고 자세히 보면 예쁘다고.’ 겨울에서 봄으로 치달으면서 삭막했던 인도 옆에 화단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화단 역시 정말 볼품없는 어느 아파트를 가나 볼 수 있는 1층 세대 베란다 앞에 있는 공용화단이었다. 평소에 뭐가 자라고 있는지 관심도 없던 화단이었다. 무심한 마음으로 지나치는 길에 눈에 초록색이 걸린 걸 보면 분명 이름 모름 풀이나 나무 혹은 꽃 등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냥 그랬다는 거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공간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금 오래된 아파트라 요즘 지어지는 1층의 조경마저도 휘황찬란한 아파트들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의 화단이었다. 그런 화단이 역시 변함없는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데 그곳을 지나가는 내 마음이 변한 건지 바라보는 시선이 확대된 건지 그냥 지나다니다 보니 뭐가 걸린 건지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봄에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이름 모를 꽃나무였다. 아파트 화단이 아니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나무라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이름을 알 수 있을 텐데 거기까지는 내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생긴 관심이기 때문에 이름을 알아볼 정도의 노력은 들이고 싶지 않았다. 여하튼 눈에 걸린 시기는 아직 한참 겨울인 음력설날이었다. 아내 친정에 인사를 가려고 역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음력설이 1월 중순이었으니 말 그대로 시기적으로는 한겨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꽃망울인지 잎망울(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인지 움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는데 무언가를 잔뜩 품고 있는 폼이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이었다. 신기했다. 아직 겨울인데 1월도 겨우 중순을 조금 지난 시점인데 2월도 남았는데 봄이라고 하는 3월이 돼도 꽃샘추위가 있는데 당장 내일 눈이 펑펑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겨울 한 복판의 나무 끝에 봄을 준비하는 무언가가 매달려 있다니...



 생명력의 위대함인 건지, 자기도 생물이라고 시기 따위는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되바라진 나무의 고집인지 모를 무언가가 눈에 걸려 나도 모르게 사진까지 찍어 버렸다. 봄이 돼서 망울이 터져 본모습인 꽃을 드러냈을 때에야 비로소 아! 꽃망울이었구나 싶었다. 봄을 누구보다 먼저 알리는 선봉장이었다.


 꽃이 먼저 핀 건지 봄이 먼저 온 건지 모르겠지만 꽃이 만개했을 때 이미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다가온 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입은 겨울옷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조금 가볍게 입고 나와야지 하면서도 관성이라는 게 무서워 계속해서 겨울옷을 입고 봄이 오는 딱히 볼 것 없는 아파튼 화단 길을 매일 걸었다. 다행이라면 한 겨울에도 옷을 그렇게 두껍게 입는 편이 아니라 겨울옷이긴 하지만 또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다.



 높은 시선이 그 꽃에 꽂혔다면 조금 아래에선 이름 모를 역시 관공서나 공원 등의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짤똥만하면서 빽빽하게 들어 선 꽃나무가 발걸음을 잡았다. 솔직히 꽃나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는데 그럼에도 시선을 부여잡은 건 꽃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신선함이 아니라 분주하게 꽃가루를 실어 나르는 꿀벌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꿀벌이 많다니... 그것도 관심을 두지 않던 늘 있었던 공간에 이렇게나 많은 꿀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니... 개인적으로 꿀벌은 너무 귀여운 거 같다. 브브브 내는 날개 소리도 귀엽고 그 토실토실한 방뎅이라니, 물론 곤충 몸의 구분에 의해 엉덩이가 아니라 배의 일부겠지만 여하튼 그렇다.(배가 귀엽다 보다는 방뎅이가 귀엽다가 더 와닿지 않는가?)


 정말 분주한 꿀벌들을 한참 보다 보니 뒤편 화단 안 쪽 땅바닥에는 뾰족한 창 같은 것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보기에 따라 다소 징그러워 보일 수도 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여름에 무성한 잎과 줄기로 화단을 꽉 채운 식물인 거 같았다. 역시 이름은 몰랐다. 모르는 게 너무 많네? 괜찮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순 없으니, 그저 바라보며 만족하고 기분이 좋아지면 그만이다. 이 정도로 서운해할 식물들이 아니다. 식물들은 오히려 과한 관심을 꺼려할 것이다. 뭐 아니면 말고.


 관심을 두건 그렇지 않건 화려하건 볼품이 없건 봄은 언제나 항상 그렇게 스며든다.



https://groro.co.kr/story/2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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