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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하는 늑대 Apr 27. 2024

숙성이 됐을 적환무

https://groro.co.kr/story/9697



 관성의 힘에 못 이겨 그로로팟 4기를 신청했다. 그로로팟 키트가 담긴 박스는 3월 중순인가 말에 온 거 같다. 그렇게 우리 집에 도착한 적환무가 담긴 박스는 한참 신발을 벗어두는 집 입구에 박스 채 있었다. 이유는 4월 초에 이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사 가는 집에 작은 화단이 있어 이왕 식물 키우는 거 실내에서 작은 화분에 깨작거리는 것보단 역시 작지만 실외의 화단에서 진짜 흙에서 키우는 게 낫겠다 싶어 미뤘다.



 이사를 왔다. 작은 화단이 나를 반겼다. 작지만 적환무 정도는 충분히 키울 수 있는 규모의 화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로로에서 제공되는 씨앗 정도는 충분히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았다. 흙인데 택배 상자를 통해 배달 오는 흙이 아닌 진짜 흙에 씨앗을 심는 맛은 그야말로 남다를 거 같았다.



 그런데 귀찮았다. 드럽게 귀찮았다. 일단 이사 후 짐 정리를 해야 했다. 그 외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집은 4층인데 작은 화단은 1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그냥 생활하는 데 있어 4층을 엘리베이터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별 문제가 없었다. 이사 오기 전 살던 아파트도 3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손에 꼽을 정도로 정말 필요할 경우만 탔다. 그런데 그게 식물을 조금 키워 보겠다고 왔다 갔다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일단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 계속 미뤘다.



 물론 그냥 미룬 건 아니다. 이거 저거 정리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간의 핑계지만 시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이사이 시간이 나긴 했지만 누워 쉬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해야 됐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면서 기존에 키우던 임파첸스 그리고 네모필라는 화단에 두고 간간히 물을 줬다. 화단에 나무들이 있었는데 울창하진 않아서 임파첸스와 네모필라에 직사광선이 내리 꽂히는 게 영 신경 쓰였지만 신경만 썼다. 물은 잊지 않고 줬다.



 어느 날 웃기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임파첸스 화분은 두 개, 네모필라 화분은 세 개였다. 임파첸스 하나는 요거트 통을 재활용한 화분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렴한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네모필라는 세 개 모두 요커트 통을 재활용한 화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물을 주러 나가 봤더니 요커트 통에 심어 둔 임파첸스가 화분 채 사라졌다. 아니 이걸 이 허접한 화분을 그리고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 식물을 누가 들고 갔지? 길냥이들이 물고 갔나? 아니 아무리 고양이들이 이상한 동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먹을 것도 없는 화분을 들고 간다고? 아니 그보다 무겁다고 이걸 길냥이가 어떻게 들고 가! 애먼 길냥이 그만 잡아! 아니 그런데 억울한 길냥이들을 나도 모르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걸 사람이 들고 갈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식물이 엄청 예쁜 것도 아니고 관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화분이 고급진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누구야? 다 나와! 나올 리가 만무했다.



 결국 범인은 잡지 못한 채 궁금증만 잔뜩 끌어안고 물을 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들고 갔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날아갔나? 바람이 그 정도 불면 화분이 날아가는 게 문제가 아닐 텐데... 뭐 여하튼 답을 알 길은 없었다. 요상한 일을 겪는 도중에도 그로로팟 4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적환무는 아직 박스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식집사 나부랭이의 귀차니즘이 생명의 신비함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루고 미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처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사를 하면서 실외에 작은 화단이 생길 예정이니 적환무를 심어서 한 번 뽑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나름 적환무를 선택하기도 했고 계획 아닌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웬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단으로 내려가 씨앗을 심기가 너무 귀찮았다. 이사하면서 정리할 일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4층을 내려가서 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답은 사실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던 대로 실내에서 막강한 틔운을 이용하든 펠렛을 이용하든 해서 우선 싹을 틔우자 그리고 나가자 하고 키트 박스를 받은 지 근 한 달여 만에 드디어 언박싱을 했다. 어라! 펠렛이 없잖아! 작은 슬릿분도 없잖아! 나가야 되잖아! 젠장! 하지만 그로로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전보다 꽤 큰 화분이 동봉돼 있기에 그제야 가이드를 읽어 보니 적환무는 잘 자라는 종이라 펠렛 등의 도움 없이 바로 파종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역시 나는 한국인이다. 가이드나 설명서 따위 보지 않는...) 아하! 이 화분에 일단 흙 붓고 씨앗 심고 뭐냐 그 작은 돌인가 모래인가를 덮어 주고 물을 줬다. 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드디어 파종했다. 그로로팟 4기까지 오면서 가장 늦은 파종이었다.(참고로 적환무를 선택한 주요 이유 중에 하나가 귀여운 토끼 피규어 때문이었는데 예상대로 딸아이에게 그냥 뺏겨 버렸다.)



 파종 후 가족들과 일이 있어 나갔다 들어왔다. 일단 화분은 실내에 두기로 했는데 또 위치가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끝에 복도 창가에 두기로 했다. 자리를 아주 잘 잡은 것 같다. 나중에 잘 크면 화단에 옮겨 심을 마음을 먹었다. 나갔다 오는 길에 아이가 차에서 잠들어 주차장에 일단 차를 대고 짐을 옮기고 화단에 아직 요거트 화분 채로 놓여 있는 네모필라들을 땅으로 옮겨심기로 했다. 이 역시 미루고 미루던 일인데 마침 할 것도 없고 이미 내려왔고 해서 그냥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생각보다 꽤 큰 난관에 봉착했다. 화분을 적당히 뒤집으면 쏟아져 내릴 줄 알았는데 빠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줘서 탁탁 칠 수도 없었다. 약하디 약한 네모필라의 메인줄기가 끊어질 거 같았다. 별 수 없이 손으로 우악스럽게 잡아 뽑았다. 헉! 안 뽑혔다. 이게 뭐야! 뒤집어서 쏟아져 내리지 않는 건 이해가 갔는데 이게 왜 안 뽑히는 거야 하고 힘을 줬다. ‘투둑’ 하더니 끊어졌다. 끊어졌다는 건 일반적으로 뭐 됐다는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무수히 많은 뿌리들이 절반이 절단 나 버렸다. 표현 그대로 그야말로 절단 나 버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냥 자연을 흙을 네모필라를 믿기로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분 모두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반 틈 절단 난 뿌리 뭉치를 화단의 흙에 대충 심었다. 그리고 물을 주면 괜찮을 거야 하고 물을 줬다.



 물을 주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보다 잘 살아갈 수 있게 자연의 흙으로 옮겨 심은 건데 죽으라고 흙에 묻은 거 같았다. 아................ 이 죄를 어찌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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