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roro.co.kr/story/11694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이 왜 하필이면 글을 쓰는 거였을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아주 짧게 지금 끝낼 수도 있고 주절주절 오만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트리며 길게 쓸 수도 있다. 여기서 끝내려고 이번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쓸데없는 혹은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나열될 거라는 점을 미리 알리는 바다.
우선 나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썰을 조금 풀어야 이 인간이 왜 하고 많은 것 중에 글을 쓰려고 한 건지 나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있다면 인내심을 발휘해 읽은 독자는 알 수 있도록 자세한 듯 아닌 듯 어린 시절부터 나란 사람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보겠다.
뭐 이런 게 중요할까 싶겠지만 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기에 이야기하면 대한민국 청주에서 태어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다. 소위 토박이다. 그것도 찐 토박이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을 하기 위해서도 청주를 벗어 난 적이 없다. 청주를 벗어 난 곳의 학교를 다닌 적은 있지만 그 흔하디 흔한 자취 한 번 안 하고 통학을 했다. 일은 첫 직장을 서울에서 시작할 수 있었지만 뭐에 홀린 듯이 청주에서 시작했다. 그 이후론 그냥 계속 청주에서 일을 찾았고 했다.
애초에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해외여행도 30대 후반 정확히 서른아홉이 되던 해에 처음 나갔다 왔다. 이후로 아내를 만나고 결혼하면서 몇 번 더 해외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그만큼 청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 생각해 보니 중간에 전국을 도는 일을 한 번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본거지는 청주에 두고 전국을 돌았다. 지금도 물론 청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초중고 시절을 돌아보면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을 때 성실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조금 잘하는 편이었고 어른들 말 잘 듣는 하라는 거 하고 하지 말라는 거 하지 않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내면에는 뭐랄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잉걸불이 일렁일렁 올라오는 경우가 잦아 주변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 속에 가끔 비치는 모습에 아주 약간의 괴리를 느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괴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깨졌다. 뭔지 모를 일렁임이 고등학교 시절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깨졌다. 아무렇지 않게 보낸 중학교 시절의 나를 비웃듯 아주 씨게 사춘기라면 사춘기 혹은 일탈이 찾아왔다. 말은 안 했지만 엄마 아빠는 특히 엄마는 속이 문드러지고 뒤집어졌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당신의 자부심인 아들이 본인이 볼 때는 이유도 없이 갑자기 망가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 했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면 좋았으련만 더 옆으로 새어 나갔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놀았던 것보다 더 신나는 고3 시절을 보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수능은 한 달 뒤였고 부자가 망하면 3년은 가는 것처럼 나름 한가락 공부를 한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 복구는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게 마음이 아팠는지 에라 모르겠다 싶었는지 수능 보기 일주일 전에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꽐라가 나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인데... 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무너져 내린 나는 원래 원하던 대학교의 과를 가지 못했다. 원래 원하던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중고등학교 교단에 서는 역사 선생님. 하지만 무너져 내렸고 다시 올라서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원치 않은 곳에 서게 됐다. 대학교 생활은 부유하는 부표 같았다. 공대를 갔는데 학과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관련 자격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본 학점만 유지하고 졸업했다. 그런데 웃기지도 않게 이 시기가 지금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세상 일 모르는 거다.
부유하던 대학시절 알바는 열심히 했다. 노래방 알바를 거쳐 카페 알바를 했다. 노래방 알바는 1년 조금 넘게 했고 카페 알바는 3년 정도 했다. 이때 바리스타라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나중에 커피 일을 하면서 살아도 재미있겠는데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대학교 4학년을 마쳐 갔다. 하지만 이 역시 의지박약으로 접어 버리고 현실적이라는 아주 좋은 핑계를 바탕으로 다른 일을 찾았다.
그게 바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지난 글에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업을 못 했다. 정말 드럽게 못 했다. 그런데 왜 영업을 시작했냐고 묻는 다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4년제 대학 졸업생이면 일을 시켜 준다고 했고 근 20여 년 전임을 감안해도 초봉치고는 꽤 많은 돈을 준다고 해서 덥석 시작했다. 이렇다 할 스펙도 뭐도 없는 지잡대 출신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준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정말 너무 힘들었다. 매일 갈굼과 쌍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지금 시대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냥 그랬다. 까라면 가고 하라면 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시대였다.
도망치듯이 제약회사를 나왔다.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래 꿈은 선생인데 선생 짓을 하려면 자격이 필요했다. 그 자격의 시작은 대학교에 다시 가는 거였다. 갈 수 있었지만 두려웠다. 귀찮았고 두려웠다. 그래서 편법으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학습지 교사 일을 시작했다. 여하튼 교사 아닌가 싶은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말이 좋아 교사지 그저 교육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는가. 영업 드럽게 못 한다고... 그럼에도 일정 부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4년 넘게 버텼다.
결국 나왔다. 나오기 전에 학창 시절에 암기과목을 참 잘했던 걸 떠올리며 공무원 준비를 한 번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책도 사고 공부를 해 봤다. 아주 약간 해 봤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한참 흘렀고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 뭘 외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순간 스스로를 합리화할 무언가를 찾았다. 공무원 준비라는 게 못 해도 1년, 보통은 2~3년, 심하면 5년도 넘게 해야 되는 건데 이왕 할 거 보다 재미있는 하고 싶은 걸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주 좋은 대안을 가장한 핑계를 찾았다.
그 핑계의 결과가 바로 바리스타였다. 아! 맞다. 대학교 시절에 카페에서 알바를 꽤 오래 했지, 그때 나중에 커피 일을 하고 살아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 현실이라는 좋은 허울로 덮어 버리긴 했지만 그 마음이 어딘 간 건 아니잖아. 좋아, 이번에 끄집어내서 실현시켜 보자 해서 커피 일을 시작했다. 나이가 차서 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구했다.
본업은 규모가 있는 일이 있고 서브로 작은 카페 하나 하시는 분이 카페를 믿고 맡길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원해서 아주 운 좋게 일을 하게 됐다. 1년 조금 넘게 작지만 내 카페도 아니지만 내가 사장인 것처럼 열심히 했다. 급여는 적었지만 그 바닥이 원래 그런 곳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커피 공부를 참 많이 한 거 같다. 카페에서 남는 시간에 이런저런 연습도 해 보고 다양한 메뉴도 만들어 보고 커피 관련 책도 참 많이 봤던 시절이다. 하지만 본업에 비해 매출이 너무 안 나와 사장님이 결국 접기로 해 별 수 없이 나왔다.
그렇게 나온 이후에 다른 카페 한 두어 곳을 더 맡아 일을 하다 이렇게 계속 카페에서 일만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급여는 한정적이고 이렇다 하게 올라가지는 않고 나이는 점점 차서 어린 친구들과 일하기도 조금 뭐 하고 물론 매니저라는 위치에서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물리적인 나이차가 크면 딱히 좋을 게 없는 곳이었다. 문득, 아참! 내 원래 꿈이 선생인데 그럼 커피를 가르쳐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자격증이 필요할 거 같아 부랴부랴 학원을 등록하고 바리스타 자격을 땄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리스타 자격은 국가 자격이 아니다. 즉, 따도 그만 안 따도 그만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엄마가 김밥을 겁나 맛있게 싼다고 치자. 너무 맛있어서 어! 이거 장사해도 되겠다 싶어 장사를 시작한다. 이때 한식조리사 자격증이 필요할까? 아니다. 필요 없다. 그냥 식품위생 관련 법규만 지키면서 가게를 열면 된다. 물론 조리사 자격을 따면 좋겠지만 필수요소는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그보다 쉬운 바리스타 일은 이상하게 꼭 자격증을 따야 된다는 인식이 박혀 있는 거 같다.
여하튼 카페 일을 시작할 때는 대학교 시절에 알바를 통해 몸에 밴 걸 바탕으로 별스럽지 않게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각 매장의 특성 등을 파악하며 바로 적응하면서 일을 했다. 하지만 누군갈 가르치려면 최소한 보여주기 위한 거라도 자격이 있어야 했기에 뒤늦게 자격을 땄다. 뭐 예상대로 자격을 따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자격을 주는 협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규정 정도만 지켜 주면 되는 정도였다. 그렇게 자격을 따고 커피강사 일을 찾다 한 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학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바리스타 자격을 하나 더 땄다. 이전에 딴 자격과 이 학원에서 딸 수 있는 자격의 협회가 달라 웃기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협회의 자격을 하나 더 땄다. 역시 어렵지 않았다.
그걸 바탕으로 학원에 오는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백화점이나 도서관 등 문화센터에 나가 강의도 하고 학원에서 운영하던 작은 프랜차이즈를 오픈하려는 점주님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때 전국구로 돌며 일을 했다. 프랜차이즈의 규모는 작았으나 은근히 전국에 매장이 퍼져 있어 전국을 돌며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었다.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었다. 카페보다 급여도 조금이지만 더 줬고 나름 원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선생과 비슷하기도 해서 이렇게 커피에 내 인생을 한 번 걸어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처 맞기 전까지의 계획만 완벽했다. 커피학원에서 웃기지도 않게 정치질이 발생했고 그 정치질의 피해자라면 피해자로 결국 그만두게 됐다. 허참... 누가 보면 뭔 대기업에서 승진하려고 여기저기 핥고 다닌 줄 알겠네 싶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뭘 할까 고민하다 전문 강사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참 매력적이긴 했는데 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떤 회사에 걸려들었는데...
그 회사가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교육회사다. 교육회사는 일전에 겪어 봤다. 제약회사를 나오고 들어 간 학습지 회사. 우리나라 교육회사의 기본적인 조직구조와 하는 일과 성격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이 회사도 뭐 똑같겠지, 겉으로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하지만 결국 교육상품 팔아먹는 영업 사원을 원하는 거겠지 하고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뭐랄까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아닌 운명 같은 게 있었던 건지 어~어~ 하다 일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왔다.
다행히도 여타 교육회사와 달리 교육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을 원하는 회사는 분명히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도 많은 회사지만 여하튼 영업적인 부분에 있어 부담이 없고 그야말로 아이들 교육에만 집중할 수 있는 회사였다. 그래서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 물론 요즘은 힘들기보다는 다소 질리는 감이 있어 일을 바꿔 보고 싶어 하고 있다.
그 일환 중에 하나가 바로 글쓰기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4년 전 여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하기 싫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코로나로 나라가 시끄러웠고 아내는 임신을 한 그 시기에 난 무책임하게도 일이 하기 싫었다. 그냥 안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어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될까? 고민하는 과정 속에 앞에 나열한 해 왔던 일들이 다시 한번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가장 좋은 선택지는 바리스타인데 겁이 났다. 나이가 찰대로 차 알바라는 명목으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내가 못 해서가 아니다. 어느 카페든 기존에 일을 하고 있는 훨씬 어린 친구들이 나를 상대하기 힘들 거 같아 알바를 할 수 없었다. 더불어 결혼하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열심히 갚는 중이었는데 카페를 차리겠다고 또 대출을 받을 만큼 배짱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뭘 하나 전전긍긍하며 일을 하다 아! 나도 유튜브라는 걸 해 볼까? 직장인들의 꿈 아닌가? 나만의 컨텐츠로 돈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회! 물론 사람들이 봐줘야 하겠지만... 그래서 일단 유튜브를 시작했다. 처음 주제는 동기부여였다. 주제에 되지도 않는 동기부여를 해 보겠다고 나름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꼴에 떠들어 봤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결과는 폭망이었다. 아니 애초에 뭘 대단하게 이룬 게 없는 인간이 도대체 누굴 동기부여 하겠다는 건가? 좋은 말과 내용이라고 해도 보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공허했으리라.
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 위해 허접하더라도 대본을 써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그 대본을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떠들기 위한 방송을 위한 대본이지만 여하튼 글 아닌가? 그런데 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네? 그렇다면 대본을 쓰는 부분을 한 번 집중해 볼까! 물론 쓴 내용들이 그지 같아 유튜브를 말아먹은 거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역시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유튜브 영상까지 만들어 올리는 것보다 훨씬 수월해 일단 해 보기로 했다.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듯이 똑같이 내용을 구상하고 대본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대본을 쓰고 떠들 내용이 아니기에 구어체를 문어체로 조금 바꾸고 영상이 아닌 텍스트 그 자체로 블로그나 여기저기에 올리면 그 파급력이라는 게 영상인 유튜브에는 못 미치겠지만 근본은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그야말로 됐다 싶어 보무도 당당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뭔가 멋들어진 시작을 한 거 같아 그런 멋들어진 시작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내가 어떤 글을 쓸 건지 그리고 글을 쓰면서 어떤 의미를 찾아갈 건지 등도 정리했다. 내용은 ‘살아 온, 살고 있는, 살아 갈 이야기’였고 그렇게 내 이야기를 속에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쏟아 내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세상에 나의 쓰임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의미로 대체했다. 아주 그럴듯했다. 머지않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것도 같았다.
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천만다행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베스트셀러 작가는 고사하고 다소간이나마 의미 있게 책이 팔리는 것도 엄청 어려운 일이라는 걸 글을 쓰기 시작하고 한 달도 안 돼 알게 됐다. 정말 다행이다. 꿈에서 공상에서 망상에서! 금방 깨어날 수 있어서 그래서 그렇게 난 다른 무엇도 아닌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을 쓰고 있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일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하고 있다.(할 수밖에 없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지금은 어떤 내용을 쓰는지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지 멋들어진 뭐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때는 그렇게 떠들었고 스스로를 속였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쓴다. 아무거나. 내가 왜 다른 무엇도 아닌 글을 쓰려고 했는지 여기까지 읽은 감사하고도 인내심이 많은 분들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그러길 바란다.) 더불어 그 이유를 아는 분들은 줄 수 있다면 답을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