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Oh! My precious
또 싱크대 안에 사과 껍질이 아무렇게나 있다.
물기 많은 싱크대 말고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리라고 수백 번 이야기해도 남편은 ‘알았어용~’ 하고는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한다. 나는 버려진 사과껍질을 보며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를 인지함과 동시에 ‘그래, 이것은 나의 욕심이다.’하고 되뇐다.
작년, 부부 상담받았을 때 비슷한 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남편에 대한 불만 가득한 내 말에 상담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남편분과 합의하셨나요?
일방적으로 남편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길 바라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화가 났던 것은 아닌가요?”
맞다. 못난 내가 남편에게 내 방식을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화를 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른 화를 참기에 마음수양이 부족하여 또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사과 껍질 여기에 넣지 말라고 말했지, 여기에 넣음 누가 치워!
결국 내가 손으로 만져서 봉지에 넣어야 하잖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남편을 향해 융단폭격을 가한다.
“그냥 놔두세용~ 이거 보고 내가 치우려고 했어.”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알아서 치우려 했는데 내가 먼저 트집을 잡는다’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답했다. 나는 눈을 한번 흘기고 물기 머금은 사과껍질을 손으로 집어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처넣었다.
남편은 회사 일과 학업을 제외하고 모든 일에 서툴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결혼 후 나는 빨래 너는 법, 청소하는 법, 밥 먹을 때 ‘쩝쩝’ 소리를 내지 않는 법 등 남편 주변을 모기처럼 맴돌며 잔소리를 했다. 남편은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고양이를 안고 방으로 사라졌다 조용해지면 다시 내 옆으로 왔다. 며칠 전, 다 돌아간 세탁기 알람을 모른 척하는 남편에게 빨래를 널어 달라고 평소처럼 잔소리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남편이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들 속에서 내 블라우스 하나만 어깨가 축 처져 삐뚤게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남편의 소심한 복수라는 것을 알아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도 나를 보고 피식-하며 따라 웃었다.
연애할 때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남편이 학교 3년 선배라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눈에 남편은 흠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직장 일도 열정적이었고 저녁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자기 계발도 꾸준히 했다. 그 바쁜 와중에 여자 친구인 나에게 최선을 다 해 주었던 본받고 싶은 완벽한 남자였다. 그런 남편과 첫 싸움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발생했다.
결혼을 결정하고 얼마 후, 내가 강남으로 회사를 옮겼다. 남편은 나를 위해 이직한 회사와 가까운 부모님과 살고있는 자신의 동네에 미리 신혼집을 구했다. 시간여유를 갖고 결혼 준비를 했지만 수많은 선택과 결정에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각자 부모님과 관련된 일은 조심스러웠고 더 예민했다. 이미 언니 둘을 시집보낸 친정 부모님은 결혼 준비 대부분을 당사자인 우리에게 맡기셨지만 시댁은 남편이 첫 결혼이었다. 집안 큰 행사를 앞둔 시부모님은 우리 결혼에 기대와 걱정이 많으셨는데, 결혼 장소 섭외와 식순 등 많은 부분을 알아서 결정하셨다. 남편과 결혼을 하는 건지 시부모님과 하는 것인지 도통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잔다르크 같은 성격을 가진 나는 시부모님의 단독 결정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결정할 일’이라며 남편과 말다툼을 해야만 했다. 남편은 부모님 의견에 대부분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연애할 때, 남편은 어른스럽고 든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며 알게 된 남편은 부모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는 ‘효자 아들’이었다. 나는 남편의 새로운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을 앞둔 여자가 피해야 할 남자 중 하나가 바로 효. 자. 아. 들. 내가 바로 그 ‘효. 자. 아. 들’에 당첨되었던 것이다. 왜 결혼 준비 중 많은 커플이 헤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싸움이 한창 고조되던 때, 화가 난 나는 지금 신혼집도 시부모님이 결정하신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이 옥죄어 들고, 머릿속이 욱신욱신해 오는 느낌이었다. 순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생각했다. 그렇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남편에게 ‘이 집을 나가겠다’ 통보하며 보이는 대로 물건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남편은 내 행동에 고개만 숙일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남편이 내 팔을 붙잡았다. 계속된 만류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거실에 남편을 남겨둔 채, 방 문을 잠그고 이불 덮고 누워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속 수분을 다 쏟아내듯 펑펑 울어버린 탓에 깨어나자마자 목이 말랐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나를 보자 미안하다며 달래주었다. 남편의 사과와 위로에 마음 속 화는 조금씩 사그라졌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시부모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집과 고집이 만들어낸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남편이 못한 말이 있다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아까……
네가 집을 나간다고 울면서 짐을 챙기는데 가방에 참기름과 간장 같은 조미료를 넣는 거야,
그 모습을 보는데…… 나도 정말 그 당시 화가 나고 그랬는데
네가 진지한 얼굴로 그것들을 넣는 모습을 보고 웃음 참느라 얼굴도 못 들고 힘들었어”
그때를 떠올리며 남편은 ‘큭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집 나간다고 하면 옷이라던가 당장 필요할 것들을 챙기지 않아?
간장, 고추장이 그렇게 소중했나-효?”
남편은 참아왔던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놀려댔다. 그때 일을 떠 올려 보려 노력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편으론 정신없이 집을 나가려 했던 나의 마음을 웃기는 해프닝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남편에게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내가 가출을 해 봤어야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