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접어든 엄마의 삶
故 김광석은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이렇게 서른을 노래했다. 이십대의 나에게 이 노래는 허세스러웠고, 서른을 넘긴 지금에는 이 노래가 "마흔 즈음"이 되는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아직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지 않다.)
나는 이 노래가 마흔 즈음의 남자의 삶을 대변했다고 가정해봤다.
그럼 마흔을 넘긴 여자의 삶은 어떨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40~60대의 삶을 삼십대 남자인 내가 알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의 삶과 중년 여성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이유중 하나는.
내 아내 역시 중년 여성의 삶을 맞이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통찰력은 놀랍지만, 나는 사르트르 역시 남자로서 절반의 통찰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선택 할 수 없는 변화가 찾아 온다. 엄마는 중년에 찾아온 폐경(肺經)과 함께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즈음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빴고 형과 나도 대학생활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폐경과 함께 찾아온 중년기를 홀로 맞이 해야 했다.
아부지(나는 아버지를 아부지라 부르는걸 좋아하는데 아빠보다는 정중하고 아버지보다는 말랑해서이다.)의 사업이 자리를 잡고 형과 내가 장성(長成) 할 때까지 엄마는 마치 세명의 아들을 키워내듯 모두의 어머니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했다.
비단 엄마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중년 여성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교육, 문화, 사회 경제적 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해왔고
자신의 정체성을 무시당한 채 출산, 육아 등 여성성에 대한 책임과 역할에 등 떠밀려왔다.
엄마 역시 '여자는 시집 잘 가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어른들의 얘기에 휘둘러 20대를 소비하듯 보내고
왜 그래야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도 없이 결혼이 엄마의 인생(母生)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편과 장성한 자식들을 통한 성취감과 별개로 스스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엄마는 심한 상실감을 호소했다.
그 당시 20대를 보내고 있던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딸 같은 아들이었고(형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윗 sweet 한 아들)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자식이 장성하기만을 기다렸던 엄마는 친가 외가의 대소사, 비밀 이야기(?)등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항상 이야기의 끝은 허무함과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마무리되곤 했는데 그 당시 중년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엄마의 추억팔이의 우수한 구매자였다.
(나는 조언이랍시고 마인드 컨트롤, 의지, 꿈 이따위 것들을 얘기했었다.)
취직 후에 나는 상당히 바쁜 삶을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엄마와 대화할 기회는 점점 줄어 들었다.
인내심이 강한 편인 엄마도 힘이 들때 내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허덕이며 살고 있는 나는 엄마를 위로해줄 여력이 없었다. '나도 좀 살자'며 엄마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는데 덕분에 엄마는 힘든 시기를 더욱 외롭게 보냈다.
사실 나는 내가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지?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는데 내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를 통해 여성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는데 이 생각은 힘든 중년시기를 보내고 있을 엄마에 대한 관심으로 커졌다.
나는 "40-50대 여성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전문적인 자료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리서치를 통해 나는 보편적인 정보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각각 발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