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놈! 놈! 놈!
미친놈
이춘복 이 미친놈아.
다음 달이 출소라니 그간 네 놈이 은미를 통해 보낸 편지들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답을 한다.
5년 전,..
배운 거 많고, 아는 것 많고 가진 것 많고 욕심, 허영심. 경쟁심까지 두루두루 뭐든 차고 넘쳤던 극성스러운 엄마들. 예의 없고 개념 없고 의욕 없고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는 그녀들의 자식들. 그들 사이에서 피 땀 눈물 흘리며 벌어 모은 내 돈. 그걸 떼이고 네가 공갈 사기죄로 감방에 들어가던 날. 돈을 끌어다 쓴 누님 친구 동생들까지 그것도 전부 여자들로만 피해자가 수십 명에 사기 금액이 수십억. 내 돈은 애들 코 묻은 정도밖에 되지 않다는 걸 경찰서에서 알았을 때.
난 너란 놈을 원망하기보다 네 놈의 감언이설에 속아 가진 돈 전부를 일말의 의심도 없이 순순히 내준 나의 무지함과 순진함에 치를 떨었다.
네 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 신입생 환영회. 무례하게 술을 권하는 선배들 앞에서 호기롭게 흑기사를 자처하며 내 술잔을 대신 비워줬던 놈. 촌스런 이름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게 신수가 훤하고 부드럽고 자상한 서울말을 쓰는 놈. 그런 네 놈을 경상도 촌년인 내가 호감을 품었던 그날. 잊을 수 없는 그날을 저주했다.
고마운 놈
하지만 이 어리석은 촌년에게도 한 가지 필살기는 있었다. 잡초 같은 생명력 이런 상투적인 말 말고, 원래부터 뭘 가져본 적이 없기에 그냥 어떻게든 살아가는 몸에 베인 습성. 그 덕에 네가 감방 안에서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호사를 누리며 턱없이 부족한 죄 값을 치르는 동안 나는 내 식대로 5년이란 시간을 살아냈다.
내가 잘 살았다 하면 그동안의 감방 생활로는 갚아지지 않을 네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걸까 싶어 망설였다만. 뭔 상관이지 싶었다. 이제 이 춘복이란 놈은 내 삶에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니 내 알바가 아닌 걸. 내가 지난 5년 세월을 돌아보며 글을 쓰는 이유는 네 죄 사함이 목적이 아닌 네놈으로 인해 촉발된 내 삶의 도전과 응답에 대한 대단원의 마무리이자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하는 이유에서 임을 새겨듣길 바란다.
네놈이 5년 형을 받고 교도소로 이감되고 나는 고단했던 서울살이 10년을 정리했다. 과외하러 가는 부자 집의 콧대 높은 사모님들한테 기죽기 싫어 구입했던 외제 차와 명품 가방 구두 옷 등을 몽땅 처분했다. 남은 카드 할부금을 갚고 나니 손에 쥔 돈이 1000만 원. 시골에서 서울 명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고 동네잔치까지 했던 부모에게 그 돈을 다 쥐어 주고 이젠 내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나고 자란 곳을 떠났다.
고향보다 더 외진 촌구석에 방 한 칸을 얻었다. 가족으로부터 멀리,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지 싶었다. 명문대 나온 덕을 보긴 했다. 장 선배 주선으로 번역 일을 얻어 구걸하지 않고 먹고살 수는 있었으니까.
그리곤 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명문대에 가고 번듯한 곳에 취업해 돈 많이 벌고 출세하면 행복해지는 건 줄 알았다. 내 불행의 싹은 시골에서 공부를 너무 잘했다는 것. 공부가 그냥 재밌었을 뿐이었는데. 공부를 못해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았어도 난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네 놈에게 뒤통수를 맞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먹고살 수 있을 만큼만 돈 버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걸 한다. 산책. 텃밭 농사. 책 읽기. 글쓰기. 나는 이제 행복하다. 웃기지만 네 놈이 나를 여기로 데려 왔다. 그러고 보면 네 놈은 내게 고마운 놈이었다.
응시한 모든 언론사 시험에서 떨어진 날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며 살짝 성형하고 다음번에 한 번 더 도전해 보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인간들에게 질리던 날. 어디서 귀신처럼 나타나 나를 야구장으로 데려갔던 네 놈. '넌 나처럼 소란스럽고 요란하지 않아 좋아' 라며 내 손에 응원봉을 쥐어주고 가슴이 뻥 뚫리게 소리칠 수 있게 해 줬던 고마운 놈.
명문대 영문과 나온 년이 취직도 못하고 놀고 있단 소리 듣기 싫어 강남 과외 시장에 발을 담그고 통장에 쉽게 수백만이 찍히는 날이 잦아졌지만 행복하진 않았던 날. 종일 편의점 삼각 김밥과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하며 입에서 쉰내 나도록 수업만 해 지치고 배가 고팠던 날.
고슬고슬하게 윤기 흐르던 갓 지은 한 공기의 밥, 고소한 들기름에 볶아 뽀얗게 끓인 미역국,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 한 마리와 새콤달콤한 오이 무침으로 차린 소박하지만 눈물 나게 맛있었던 한 끼. 그 한 끼를 뚝딱 만들어 마음이 더 허기졌던 나를 따뜻하게 채워졌던 고마운 놈.
이제는 인정한다. 황폐하고 암울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 가끔씩 찾아왔던 행복한 순간들은 전부 네 놈과 함께 했던 때였음을.
잊어야 하는 놈
네 놈 재판에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선처에 달라는 호소문을 썼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돈을 떼이고도 네 놈을 그렇게 쉽게 용서했던 여자들을 다 이해한다.
네 놈에게 떼인 돈은 내 행복의 값으로 지불한 셈 치기로 했다. 그리고 내 놈이 나한테 했던 모든 행동들이 진심이었는지 등 쳐 먹으려고 했던 사기 행각이었는지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네 놈은 이제 나에겐 잊어야 하는 놈.
우연이라도 만나지 말자. 안녕!
인생의 고비고비 아픔과 어려움을 담대하게 겪어내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친구들에게 영감을 받아 쓴다. 그녀들의 지혜와 용기에 존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