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선풍기 바람이 불현듯 차게 느껴져 이불을 덮었다. 선풍기가 불어주는 바람 조차 시원하지 못 하다며 차 내밀었던 이불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음력 절기가 바뀌면 정말 거짓말처럼 공기도 바뀐다. 계절의 오고 가는 것을 마음껏 느낄 때부터, 조금씩 무뎌질 때까지 경험치 상승한 지금의 난, 문득 이 계절이 길다 느껴지면 달력을 꺼내 다음 절기를 찾아보기도 한다. 이번년도 여름은 특히나 다음 계절을 기다리게 될 정도로 무더웠다. 에어컨을 잘 틀지 않았던 내가 익어가는 집안 공기에 리모컨을 집어 들 정도 였으니.
입추를 기준으로 날이 많이 선선해졌다. 내 아파트의 아침 풍경은 가을이 멋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는 베란다로 향할 때마다 설렜다. 가벼워진 바람이 주는 산뜻함과, 차가운 듯 시원한 공기는 지나왔던 많은 날 중 이와 비슷했던 날씨의 추억을 데려온다. 아찔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모든 것도 다 웃어 넘길 수 있게 된 현재의 나는, 머물러만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조금은 커진 듯 해 안도의 미소도 지어본다.
그럴 때도 있었지, 그런 일도 있었지. 나름 재밌었지, 좋은 시간이었어.
이 공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으로, 혹은 되돌아가고 싶은 그 날의 노래로 내 귀를 적시면 3D 영상을 보듯 몸은 여기에 있지만 영혼만이 그 시절로 여행을 떠난다. 돌아 간다 해도 그 때를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애타는 마음이 아닌 느긋해진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본다. 마음껏 너그러워진 내가 웃어본다.
29년 째 되던 해에 나와 약속을 했다. 단 한 가지도 꾸준하게 하지 못 했던 나의 인생에 작은 습관을 만들어 보자고. 힘들 때만 썼던 일기 말고, 좋은 일 나쁜일 가릴 것 없이 매일을 기록 해 보자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질려하지 않을 예쁨으로 심사숙고하며 고른 다이어리가 이제 중간을 넘어섰다. 기록을 해왔던 부분과, 기록을 해 나갈 부분의 경계가 뚜렷해진 나의 다이어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종이 한 장을 채워가는 것이 빠르게만 느껴진다. 단순한 한 페이지가 아니기에 진지하게 펜을 들게 된다.
'지금까지 난 무얼 한거지?' 하던 습관적 탄식이 쏙 들어갔다. 늘 한숨과 함께 뱉었던 그 말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고, 그로 인해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만큼 성장한 내가, 뒤를 돌아 열심히 달려오는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숨 고르고 있는 자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자의 심박수는 다르기에 시선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저번 달의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보고 싶다면 이젠 내 다이어리를 펼치면 된다. 답이 나오지 않는 걸 수없이 반문하며 답답해 하던 것이 기록을 통해 사라졌다. 지나온 나의 자취를 물어볼 조용한 상대가 생긴 것이다. 덧붙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 해주는 무자비한 기록이란 존재가.
쌓여가고 있는 지금의 난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매일 써 내려가는 이 글도, 지우지 않고 한 번에 써내려간 적 없는 문장 하나도 매끄러워진 듯 아닌 듯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작게 시작했던 나에 대한 물음들이 자꾸만 커져서 이젠 내가 하는 일들까지 의문으로 가득해지고 있다. 남들이 잘 한다고, 잘 했다고 하는 나의 창작물들도, 내가 맞다며 인정해주는 남들의 끄덕임도, 내가 하는 말들도...
이게 정말 맞는 걸까?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수 없이 의문이 든다. 내 눈엔 그저 그래 보이는데 왜 남들은 잘했다고 해주는 걸까? 내 입에선 '별로인데'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귀에 들어오는 말은 '괜찮은데' 일까?
내가 맞고 그들이 틀리다면 아쉬움이 남고, 내가 틀리고 그들이 맞는다면 의아함이 남는다.
35권 정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차곡차곡 읽으니 이제는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느껴진다. 책이면 다 똑같지, 작가면 거의 비슷하겠지 했던 나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책과, 그냥 책의 기준이 정해진 것이다. 물론 주관적인 것 이겠지만. 감탄을 하며 읽은 책을 본 뒤 내가 쓴 글을 읽으면 난 애송이에 불과하단 느낌을 많이 받았다. 창피하기도 하고, 남 보여주기 부끄러워지는데 모르면 용감하다고 5분 안에 써내려갔던 내 글이 만족스러워 만천하에 공개했던 그 때의 내가 참 작게 느껴진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것, 지나갈 것 같지 않았던 그 시간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것과 충실한 현재로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됬기 때문이겠다.
자고 일어나니 계절이 바뀌어 있던 것처럼 눈 떠보니 달라진 나를 기대해봐도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