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퇴사일기
간호과에 다닌다고 하면 제일 먼저 듣는 말이 있다.
"간호학과 힘들지 않아?“
1학년 때부터 전공과목만 빼곡히 들어야 할뿐더러, 재수강, 계절학기도 불가. 실습 시간만 1,000시간을 채워야 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그렇다 보니 주위에는 항상 볼멘소리로 투덜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공이 어쩌고, 학점이 어쩌고, 쪽지 시험은 어쩌고. 졸업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소셜미디어에 간호학과 학생들의 고충을 담은 게시글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것을 보면 혹독한 학과 생활은 여전한가 보다.
나라고 불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성적 외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봤자 나만 힘들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불만이야 있든 없든 나에게는 중도 포기하던가, 남아있던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존재했으니까. 그 당시 달리는 경주마처럼 주위를 둘러볼 겨를 없이 당장 내일 있을 쪽지 시험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의심도, 불만도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한 학기마다 자퇴를 고민하던 동기들도 4학년이 되고 취업 시즌이 다가올 때가 되니 대부분 해탈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냥 취업이나 하자.
고등학교와 다를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동기들은 병원이라는 또 다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순종적이던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내가 무엇에 관심 있고, 무엇을 잘하는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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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된 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이 말의 경우 상황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져서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곤란할 수 있다. 그 상황을 먼저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첫 번째. 가족이나 지인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무슨 문제냐고 물을 때다. 큰 문제가 아닌데도 과장되게 걱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삼자의 설명만 들어서는 뭐가 문제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병원 가 봐.'라고 말하면 흥분에 가득 찬 동그란 눈이 세모가 되어서 되묻는다.
"너, 간호사잖아."
홍길동도 아니고, 간호사를 간호사라고 말하지 못하고…이건 아닌데. 어찌 되었건 간호사라서 몰라. 아니, 의사라도 말만 들어서 어떻게 알겠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꿀꺽 삼키고서 두 눈을 애써 외면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니까 뭘 알겠어…’ 은연중에 드러나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실망감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날 때가 많았지만 내공이 쌓일수록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답은 스트레스다.
예를 들어 “엄마 친구가 이렇다는데 왜 그런다니?”라고 물어보면 “스트레스 때문이야.”라고 적당히 말하면 된다. 나 또한 병원에 가면 통증의 원인이 항상 스트레스라는 대답을 들어왔다.
의료인에게 가장 쉬운 대답은 스트레스였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직도 모르는 것처럼 특정 사람이 특정 질병에 걸리는지 밝혀내는 것도 골치 아픈 난제다. 여하튼 간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모든 질병의 근원은 스트레스가 맞다.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면 그 사람은 병원에 가게 되어 있다. 어쨌거나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간호사잖아’ 시리즈의 두 번째는 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듣는 경우다. 모든 사람이 알듯이 병원 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 상황이다. 더군다나 입원의 경우 개인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기 때문에 그 수치가 가히 엄청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단점인 환자 수 대비 의료인 부족 현상으로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불만은 잔뜩 쌓일 수밖에 없다. 입원하자마자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수많은 동의서를 마주하고, 언제 퇴원하는지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이송 직원에 이끌려 검사실로 이동하는 게 전부다. 간호실에 회진 시간이 버젓이 적혀있어도 한 번도 의사를 본 적 없는 환자들의 불만은 당연히 간호사를 향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고객의 불만 사항을 듣고 해결하는 건 직원 중 한 사람의 의무지만 불가능한 요구를 당연하게 말하면 곤란할 때가 많다. 흔히 ‘JS’라고 부르는 진상 환자들이 퇴원하는 날까지 똑같은 컴플레인을 할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속으로 읊조린다.
저는 한낱 말단 직원인 간호사입니다요.
교수를 불러오라던지, 병원장을 찾으신다면 곤란해요.
불만을 들어드릴 수 있지만 전부 해결할 힘은 없어요.
이런 경우에 담당 의사가 와서 이야기를 들어주면 다행이지만 슬프게도 JS 환자들이 퇴원할 때까지 담당 간호사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돌아이 불변의 법칙’처럼 아무리 예민한 환자들이 모인 병원이라고 해도 블랙 컨슈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 임박한 환자와 보호자일수록 순수하고 솔직한 편이어서 일방향 소통 방식과 의료인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넓은 아량에 간호사로서 숙연해질 때면 그들은 오히려 손사래 치며 말한다.
“간호사잖아요.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을 보면 나도 간호사 이전에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근무 시간이 되면 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열악한 현실이지만 사소한 선심이 때로는 큰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내 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간호사 카트를 세워놓고, 한참 동안 병실에 있다가 돌아와 보면 보지 못했던 빵이나 음료가 올려져 있을 때도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한창 노(No)마스크에 예민해져 있을 시기에 극구 사양을 해도 기어코 정성스럽게 깎은 과일을 입에 넣어주는 상냥한 보호자도 많았다.
“부모님이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 우리 딸이었으면 절대 간호사 안 시킬 거야.”
간호사니까 당연히 이건 이렇게 해야지, 라는 말을 듣다가도 한 번씩 가슴 어린 말을 들으면 괜찮은 줄 알았던 눈물샘이 터지곤 했다. 그것도 6인실 병실에서 환자에게 심한 투정을 듣고 난 후에 들으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요.
나의 부모님은 간호사라는 직업이 힘든 줄 아시지만 실제로 내가 어떤 말을 듣는지 잘 모르셨다. 마음에 담아둘 만큼 큰 상처를 입어도 좀처럼 남에게 털어놓는 일이 없는 나는 혼자서 삭힐 뿐이었다. 내가 투정이라도 부리면 주변 사람들은 당장 그만두라고 말할 것이다.
힘들고, 더럽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왜 하냐고.
그럴 때마다 힘들다 내색하지만 나는 종종 말한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지 않냐고. 그 누군가가 반드시 나일 필요는 없지만, 그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지 않냐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했다. 내가 간호사를 선택했으니, 그 책임 또한 오롯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어느 날 장기 입원 중인 환자의 보호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보호자 없이 간병인과 함께 지내고 있어 틈틈이 환자는 잘 지내고 있냐고 묻던 아들이었다. 이번에는 늘상 걸려온 안부 전화가 아니었다. 며칠 전 환자는 한 차례 의식을 잃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의식 저하는 초응급 상황이기에 곧바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진행하였고, 다행히 뇌를 비롯한 다른 장기에 큰 문제가 없어 안정을 취하던 중이었다.
알코올중독으로 간부전을 앓는 환자들은 종종 티아민 결핍으로 신경계 이상 증상을 보이곤 한다. 이러한 증상은 간이식 후에도 종종 나타날 수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담당 의사가 차분히 간병인을 불러 환자의 현 상태를 알렸고, 의식 저하가 재발할 수 있어 한동안 상태를 지켜봐야 해서 당분간 퇴원은 어렵다고 말했다. 간병인은 다소 한국말이 서툴지만, 심성은 고운 사람이라 한참을 환자 곁에서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간병인에게 이 소식을 전달받은 아들이 환자가 걱정되었는지 늦은 밤에 전화한 것이다.
“환자 상태는 어떤가요? 간병인에게 설명을 들었지만, 그분이 한국말을 잘 못하시니까 제대로 이해가 안 가서요.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잠시 통화 가능할까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언제든 전화하시라고 말해도 아들은 병동에 전화할 때마다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지금 병동에 의사 선생님이 없으신데, 제가 간단히 설명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담당 간호사님이시잖아요.”
환자 나이가 많은 만큼 아들 보호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데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정중히 물어볼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물론 대화에 있어서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함은 당연하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지만 가끔 병동에 전화를 거는 퇴원 환자나 보호자를 보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때로는 간호사라는 이유로 살면서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듣기도 했다. 전화는 상대방의 얼굴과 제스처를 볼 수 없고 오롯이 목소리로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만큼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상해서 십상 뾰로통한 말투가 나오곤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나는 유니폼을 입고 병원에 있는 이상 간호사인 동시에 이 병원을 대표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원이기 전에 나 또한 사람인지라 상대방의 말투에 따라 상냥한 말을 할 때도 있었고, 반대로 같은 사람이 맞을 정도로 쌀쌀맞게 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태도는 변해갔다. 날이 선 말을 들을 때 나도 똑같이 말해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이 시원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부정적인 언어는 높이 쏘아 올린 공처럼 가속되어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더욱이 환자와 보호자는 내가 돌보아야 할 간호대상자였다. 내가 날카로운 말을 할 때마다 가뜩이나 질병과 통증으로 신경이 곤두선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을까 생각하면 철없던 행동이 후회되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불만의 대상은 며칠을 입원해도 오지 않는 교수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예정에 없었던 검사들, 끝없는 금식이 될 때도 있다. 나한테 왜 저런 말을 할까, 생각하며 기분 상할 것이 아니라 간호사로서 퍼렇게 멍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 급선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말에는 아주 큰 힘이 숨어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순한 양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성난 환자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다 보면 당장은 소용없는 일처럼 보여도 그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면 효과를 보일 때가 많다.
“간호사님에게 신경질 내려는 게 아닌데, 너무 힘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랬나 봅니다. 미안합니다.”
음료수를 건네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들을 보면 미워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어느새 라포(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형성된 환자와 보호자들은 든든한 내 편이 된다. 나는 잠시 후에 오겠다고 말하면 한없이 나를 기다릴 환자들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몇 분 뒤’에 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종 다른 일에 붙잡혀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나면 병실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간다. 그때마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반색하며 맞는다.
“그렇게 뛰어오시지 않아도 돼요. 간호사님이 바쁘시면 늦으실 수도 있죠.”
종종 주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던 환자와 어떻게 라포를 쌓았냐고. 정답은 이해와 공감에 있다. 대부분 입원한 환자들의 불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어떤 말투와 단어를 선택하든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끝까지 듣고 그 해답을 찾으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자연스레 사람으로 치유되기 마련이다.
“간호사? 힘들겠다. 잠은 잘 수 있어?”
“너, 간호사잖아.”
안쓰럽게 쳐다보는 눈동자와 실망 가득한 눈동자가 교차하여 나를 내려다본다. 한때 피해만 다녔던 그 시선을 이제는 올곧이 쳐다보며 말하고 싶다. 힘든 줄 알면서 간호사를 선택한 내 탓이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그 길이 힘들지만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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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한 편이상 글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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