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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름 Oct 29. 2023

외과 간호사의 손

간호사 일기

어렸을 때 「갓핸드 테루」라는 의학 만화를 정말 재밌게 봤던 경험이 있다. 「갓핸드 테루」는 외과 의사인 주인공이 종합병원에서 다양한 수술을 집도하면서 성장하고 활약하는 모습을 다룬 만화다. 지금이야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의학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지만 당시 의학을 소재로 한 매체는 매우 드물어서 어린 나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주인공 ‘테루’는 의욕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의사에서 시작해서 모든 의사가 포기하는 어려운 수술을 해내는 명의, 말 그대로 신의 손으로 거듭난다. 얼마나 만화에 빠져들었는지 한때는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냥 명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간호사의 손은 무엇일까. 오랜만에 생각나서 「갓핸드 테루」를 펼쳐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외과 의사의 손이 ‘갓핸드’라면 과연 외과 간호사의 손은 뭐라고 표현되면 좋을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물음이 떠올랐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에 가느다란 핏줄이 몇 가닥 보이지만 손가락은 가늘고 긴 편이다. 종종 환자, 보호자들에게 손이 어쩜 그렇게 예쁘냐는 말을 들어서 내심 자부심을 느끼는 손이다.



그런데 손바닥을 뒤집어 보면 그렇게 형편없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손 피부염으로 왔다가 이제는 만성 질환으로 눌러앉은 습진 때문이다. 주변에 많은 간호사 선후배들이 손 피부염으로 원내 진료를 봤지만, 차도가 없는 걸 직접 목격해서인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 수포가 난 자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따갑고 아려서 기어코 병원을 찾았다. 피부과 의사는 돋보기로 내 손을 살피더니 단호히 말했다.

 


의사: 딱 보니 습진이네요.

나: 습진이요? 습진은 주부만 걸리는 거 아닌가요?

의사: 절대 아닙니다. 직업이 뭐죠?

나: 간호사인데요. 치료 방법이 없나요? 따가워서 미치겠어요.

의사: 처방해드리는 연고 자주 바르시고 최대한 물에 안 닿게 관리 잘 해주셔야 해요. 지금은 수포 때문에 아플 수 있지만 얼마 안 있으면 많이 간지러울 거예요.

나: 병원에서 일하니까 손을 자주 안 씻을 수가 없는데요. 약 바르면 금방 나을까요?

의사: 최.대.한. 손 씻지 마세요. 습진, 그거 잘 안 나아요.

나: (간호사보고 손을 씻지 말라고?) 네…….

 


울며 겨자 먹기로 피부과를 나섰다. 당장 그날 밤 쩍쩍 갈라져 보기 흉한 손마디에 스테로이드 연고를 듬뿍 발랐다. 낮에는 활동이 많으니 밤에 바르는 것이 좋다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기로 했다. 모름지기 약은 약사에게. 두고 봐라. 잘 안 낫는다는 말, 보기 좋게 비웃어주지. 부푼 희망을 안고 눈을 감았다.



새벽 두 시.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손 바닥이 불이 난 듯 화르륵거렸다. 도대체 내 손에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리둥절했다. 비몽사몽 중에 형광등을 켜다가 자빠지기까지 했다. 실눈을 뜨며 벌게진 손을 봤다. 이건 또 왜 이래? 씩씩거리며 처방받은 약을 검색했다.

 


부작용: 모낭염, 부스럼, 피부 자극, 발열, 작열감, 발진, 발적, 홍조, 가려움, 피부 건조

 


나는 약발도 안 받는구나…. 처방약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은 저만치 우주 밖으로 던져버린 나는 번쩍거리는 모니터 앞에서 탄식했다. 약발이 안 받는다면 악바리로 버텨야 했다.

 

손을 안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김없이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소독제를 듬뿍 뿌렸다(사실은 자동 분사 방식이라 내 맘대로 양을 조절할 수 없다). 알코올이 날아갈 때까지 잘 닿지 않는 엄지손가락까지 꼼꼼히 문지른다. 지침대로 30초까지 기다릴 순 없어도 충분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손을 혹사한다. 병동에서 감염관리자로 활동할 때는 남들보다 더더욱 손 소독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는 사람이 엉망진창이면 되겠나 싶어서 오기로라도 열심히 손을 닦았다. 그 덕분에 손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비단 감염관리자가 아니더라도 환자들에게 손 위생을 교육하듯 의료진들 또한 손 위생 시점을 철저히 지키도록 교육받고 있다. 간호사가 주로 가는 병실 앞과 복도, 스테이션, 컴퓨터 옆, 투약 준비구역 그 어디를 가던 손 소독제가 있다. 마치 ‘이 정도로 비치해놨으면 손 소독 좀 하고 가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솔직한 말로 괜스레 찔려서 겉햝기 식으로 한 적도 몇 번 있다.

 


나도 손 소독제 쓰는데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손 소독제는 두 가지가 있다. 내원 고객용 손 소독제는 에탄올 함량이 대략 60% 정도로 의료진용과 비슷하지만 젤 타입으로 손을 보호하는 카보머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손 소독제를 덧뿌리면 손이 끈적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쉽게 찢어지는 폴리 글러브 대신 매일 라텍스 한 트럭이 배달되는 격리 병동은 로타바이러스를 비롯해서 반드시 물로 씻어야 하는 수인성 바이러스까지 씻어 내는 항균력이 아주 강한 액체형 손 소독제를 사용한다. 당연하게도 간호사들 손은 남아나지 못하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의사의 손이 생명을 살리는 신의 손이면, 간호사의 손은 단연 마음을 어루만지는 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한마디 말보다 손이 가진 힘을 믿는다. 따스한 손은 종종 본인조차 알아차리기 힘든 상처까지 어루만진다. 때로는 타인에게 털어놓아야 해결되는 응어리가 있는 반면에 말을 하지 않아도 손길 하나에 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병원에 혼자 입원하는 환자들을 보면 유독 마음이 쓰이는 이유다.


한국 사람들은 남에게 굳이 병치레를 알리기 꺼려 한다. 혹여나 상대방에게 심적 부담될 수 있다는 염려가 깔려있다. 때로는 가족들까지 환자의 병세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는 경우가 있어 동의서를 작성하거나 경과를 설명할 때 난감할 때도 있다.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고 병원에 달려오는 보호자들을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보다 말을 해야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많게 느껴진다. 선뜻 말을 꺼내기 부담스럽다면 어떤 형태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많듯이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통상적으로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사적인 대화가 자주 오가지 않는다.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기에는 업무가 너무 많고, 환자들도 그걸 알기에 불필요하게 간호사를 찾지 않는다.

“스테이션에 나와서 담당 간호사를 찾지 마시고 차라리 호출벨 누르세요.”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간호사도 있다. 업무 공간인 스테이션에 환자들이 서성이면 아무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같은 동료인 내가 들어도 때로는 그 말이 얼음장보다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수록 내 언행을 반면교사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이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날이 선 고슴도치를 만지는 것처럼 항상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익숙한 사람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다. 내가 한발 한발 천천히 다가갈수록 환자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처럼.



간호사는 2시간마다 병실을 순회하며 환자가 잘 있는지, 약은 제 속도에 맞게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짧은 순간이 환자들과 나의 유일한 시간이다. 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 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수다쟁이가 된다. 퇴근 후 찾아본 개그 모음을 재밌게 들어줄 때마다 더 열심히 연습하는 계기가 된다.



끙끙 앓는 소리, 여기 좀 봐주세요, 사람 살려…. 밤낮없이 온갖 소리가 들리는 삭막한 병원에서만큼은 환자들이 힘든 일을 털어낼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싶다. 선뜻 말을 꺼낼 수 없는 엄숙한 상황일 때면 차가운 두 손을 꼭 마주 잡는다. 재이식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거나, 암이 아니길 바랐지만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내 오랜 경험상 위로 가득한 말보다 단 한 번의 손길이다.

 


건강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힘든 수술이 되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 가족을 위로했지만 어떤 말도 전혀 들리지 않을 때였다. 십 년이 지나고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람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나를 고깃집으로 데려가셨다.

“밥 묵자.”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 어떤 한마디도 없이 밥만 먹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너무도 감사했다. 환자들의 마른 등을 어루만질 때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환자 접촉 전, 환자 접촉 후 반드시 손 소독! 오늘도 잊지 않는다. 갈라진 손 틈사이로 독한 소독제가 들어올 때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누군가는 의아해한다. 눈으로도 알 수 있는데 굳이 손 고생을 사서하냐고. 그러나 내가 주사 자리를 꼼꼼히 만지고, 복수로 남산만한 배를 어루만지는 행위는 하나의 주술이다. 엄마 손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손이 약손이길 바라며.


그러니 내 손을 보고 예쁘다는 말보다 참 따뜻하다는 말을 해주었으면 한다. 아참! 보기보다 따가우니 손이 닿기 전 미리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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