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없는 행복
밤 열한 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32층 높이에서, 나는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글자도 없는 화면과,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
그렇게 시간만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 창밖의 도시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내 안은 잔잔하다 못해 고요했다.
머릿속은 텅 비어져 있었고, 마음은 정리된 서랍처럼 아무것도 꺼낼 수 없었다.
감정의 찌꺼기조차 남지 않은 채, 침묵과 정적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가로등이 흘려보내는 빛줄기가 창문에 비치고, 강변의 불빛들이 검은 강물 위에 황금빛 파편처럼 흩어졌다.
“또 밤샐 거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민준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우유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짙은 네이비색 실크 잠옷을 입은 그의 실루엣이 거실 조명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단정한 자세, 절제된 미소.
변호사라는 직업이 온 몸에 밴듯, 집 안에서도 그는 항상 단정했다.
그의 등장은 방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하지만 그 온기는 어디까지나 체온의 따뜻함일 뿐, 심장을 뛰게하는 열기는 아니었다.
“응, 조금만 더.”
잔을 건네받으며 나는 미소 지었다.
억지로 만든 표정은 아니었다.
고마웠고, 편안했다. 다만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사랑이라기보단, 배려와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 열정이 아닌 배려.
우리가 나눈 감정은 그런 종류였다.
민준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내일 출판사 미팅 있잖아.”
“알고 있어.”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부부였다.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고, 적당한 거리와 호흡을 유지하며, 무엇보다도 서로를 괴롭히지 않는 관계.
친구들은 우리를 '쇼윈도 부부'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건 타협이 아닌 선택의 결과였다.
사랑보다는 평화, 설렘보다는 안정.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관계야말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민준의 슬리퍼 소리가 침실로 사라지자, 방 안엔 다시 노트북 화면만 남았다.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며 마치 내 안에 남아 있는 말들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꺼내려면 조금 더 정리가 필요했다.
감정이 너무 낡으면, 글로도 표현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첫 문장을 생각했다.
『사랑의 끝에서, 나를 선택했다』
제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와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등을 돌리고 나왔던 그 날부터일까.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강은 밤의 장막 속에서 검은 비단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변의 불빛들이 물 위에 부서지며 황금빛 파편처럼 흔들렸다.
손에 잡힐 듯 빛났다가도 흩어지는 모습은 오래전 나의 감정을 닮아 있었다.
아름답지만, 다시는 붙잡히지 않는 것.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는 아무런 파동도 없었다.
감탄도, 설렘도 없는 고요함.
마치 오래전, 감정이라는 것을 조용히 내려놓기로 한 사람처럼.
나는 언제부터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 언제 이렇게 되기로 결심했을까.
마흔한 살.
이름 있는 UXUI 디자이너이자 책을 낸 작가.
배려 깊은 남편과 안정적인 결혼생활.
창밖엔 한강이 반짝이고, 누가 봐도 안정된 삶.
그리고 나도 그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점을 아쉬워했다.
“넌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아~! 좀 더 뜨겁게 살아도 되는데."
친구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나는 이미, 너무나 뜨겁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스물여덟.
그때의 나는 순진했다.
사랑이면 뭐든 가능하다고 믿었다.
진심을 다하면 상대방도 변할 수 있다고, 헌신은 언젠가 보답받는다고,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모니터 속 커서가 멈춰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멈춰섰다.
‘그는 숨결처럼 내 삶에 스며들었다.’
첫 문장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13년 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선배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 소개팅 자리.
그때의 나는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며 연애는커녕 인간관계조차 버거웠다.
남자는 무슨 남자, 그런 시기였다.
소개팅은 피곤함 그 자체였고, 그날도 마지못해 참석한 자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지혁입니다.”
훤칠한 키, 단정한 말투, 여유 있는 미소.
수려한 외모와 말끔한 인상, 그리고 보조개.
그 순간 내 가슴 어딘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다.
고급스러운 매너, 그럴듯한 직업, 남자다운 자신감.
그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속엔 작은 결핍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그게 내 호기심의 시작이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후로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졌다.
마치 투명한 바람결이 창틈으로 스며들 듯, 바람이 창틈을 파고들 듯 은근하게, 조용히.
“너는 참 착해서 좋아.”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던진 그의 말.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왜인지 그 말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었다.
돌이켜보면 신기하다.
왜 그의 무책임함을 자유로움이라 믿었을까. 왜 감정 회피를 이해하려 했을까.
아마도 내가 그를 바꿀 수 있다고, 내 진심이 그를 바꿀 거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때로 상대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
나는 그의 불안정함을 안정으로, 회피를 솔직함으로, 무책임을 책임감으로 바꿔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 될 거라 착각했다.’
문장을 마치고 나니 가슴이 살짝 저려왔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13년이라는 시간은, 슬픔조차 관찰할 수 있게 만든다.
민준과의 결혼은 3년 전이었다.
연애 2년, 결혼 생활 3년째.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약속을 지켰으며, 내 감정을 흔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었던 어느날 그는 내게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진지한 울림이 있었다.
“서연아, 날 사랑해?”
나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가슴이 크게 뛰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런 것 같아.”
그는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도록 웃었다.
웃음 속에 안도와 장난이 뒤섞여 있었다.
“충분할까?”
나는 그의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끝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충분하다고 생각해. 미치게 사랑하지 않아도 돼.
대신 서로를 존중하고, 다치게 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사랑 없는 결혼이 무슨 의미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 사랑, 나를 지켜주는 사랑.
나는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고, 나는 다시 한 줄을 써내려갔다.
‘그와의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어리석었던 계절이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감내했고, 진심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허락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진심도, 변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겐 닿지 않는다는 걸.’
그 남자, 강지혁.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까.
가끔 궁금했다. 정말 가끔.
SNS를 뒤져보고 싶은 충동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참았다.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을 본 건 2년 전, 지인의 SNS에 태그 된 그의 사진이었다.
여전히 멀쩡했고, 여전히 그럴듯 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텅 빈 듯, 지친 듯, 외롭고 피곤한 얼굴.
나는 그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움도, 원망도, 동정도.
단지 생각했다.
‘이제 이 사람은 내 인생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구나.’
그 순간, 나는 그를 진짜로 떠나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민준은 고른 숨을 쉬며 자고 있었고,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내일은 출판사 미팅이 있다.
“왜 이런 소설을 쓰시나요?”
편집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 이야기예요. 하지만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침실 문을 열자, 민준의 고른 숨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그의 곁에 누웠다. 그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은 행복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건 내가 선택한 행복이라는 점이다.
고개를 기울이니, 민준의 호흡이 여전히 잔잔한 파도처럼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 깨달았다. 불꽃은 아니지만, 은은히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빛.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진짜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끝에서, 나를 선택했다』 그 제목은 결국 나를 향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마지막으로 단 하나만 인정하자면, 내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그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단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아프지만 고마운 기억일 뿐이다.
내일은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여름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가 내리고 햇살이 미친 듯 쏟아지던 계절.
마음마저 후끈하고, 감정과 선택과 숨결이 뜨겁게 소용돌이쳤던 시간.
그리고 마침내, 내가 나를 선택한 그 순간까지.
창밖의 한강은 여전히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어둠과 빛을 함께 품은 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꼭, 지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