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2

진심이면 될 줄 알았던 시절

by 디자이너 야니

우리는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연인이 되었다.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고, 다음 날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다음엔 서로의 하루 끝에 인사하지 않으면 허전해졌다.

감정이 이름을 갖기 전, 우리는 이미 서로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은 40평대의 고급 아파트였다.

넓은 창과 조용한 뷰, 높은 천장에 깔린 조명까지 완벽했지만, 그 안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웠지만 온기가 없었고, 살림살이조차 형식적이었다.

식탁에는 늘 세팅된 듯한 테이블 매트만 덩그러니 있었고,

거실의 소파 위엔 쿠션 하나 없이 차갑게 정돈만 되어 있었다.

예쁘지만,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여긴 너무 깨끗해서 좀 무서워."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살짝 패인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미소에 나는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게. 그래서 네가 자주 와줘야겠네."


그의 말이 단순한 농담은 아니었는지, 그는 나를 자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했고, 그의 집에 어울릴 만한 작은 화분이나 소품들을 고르러 다녔다.


어느 주말 오후, 우리는 작은 원예점에서 하얀 도자기 화분에 담긴 다육식물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죽으면 어떡해?"

"물만 가끔 주면 돼. 걱정 마, 나도 있잖아."


우리 사이에는 따뜻한 미소가 오갔고, 그 순간이 묘하게 포근했다.

그렇게 소소한 물건들이 하나둘 그의 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는 내가 고른 접시가 놓였고, 비어 있던 화장대에는 내 화장품이 자리 잡았으며,

함께 나간 쇼핑길에는 우리가 함께 덮을 이불이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의 침대에서 눈을 감은 채 뒤척이다 문득 멈칫했다.

이불 속 어딘가에서 익숙한 향기가 은은히 퍼져 나왔다.

내 향기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공간은 점점 나의 흔적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 집은 너랑 있으니까 사람 사는 집 같아져."


그도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그의 집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그 모든 순간들이 마치 신혼을 미리 겪는 것처럼 설레었다.

처음엔 데이트였지만, 이내 곧 우리의 생활이 되어갔다.




가을빛이 창가를 물들이던 날, 그의 집엔 햇살 대신 은은한 그늘이 머물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나뭇잎이 유리창 너머로 흔들리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그런 오후의 정적 속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결혼하고 싶어?"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젠간."


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 자주 집에서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었다.

주방에선 맛있는 향기가 피어오르고, 그의 손끝에 묻은 소스 자국조차 정겹게 느껴졌다.

어딘가 서툴고 불안정했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기대라는 이름의 감정이 자라기 시작했다.

마치 가을 햇살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들꽃처럼, 조심스레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 따뜻함이 조금씩 쌓여갈 무렵, 나는 그의 쓸쓸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있는 데 익숙했고, 감정을 나누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고, 내가 묻지 않으면 자신의 이야기는 깊게 말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의 고요함 속엔 자주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가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나는 그 속에 말을 걸지 못한 채 앉아 있기만 했다.


그렇게 말없이 흐르던 시간 틈으로, 작고 낯선 균열이 하나 들어왔다.

그의 휴대폰에 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연락이 계속 왔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화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물으면 그는 "스팸이야, 요즘 진짜 많더라"며 얼버무렸다.


나는 그런 그를 의심하기보다는, 그저 그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 그는 밤에 혼자 통화하러 나가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당시 나는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언젠가는 그도 스스로 열릴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그런 믿음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네”라는 말 한마디에 새벽에 찾아와 죽을 끓여주던 그의 모습,

아무 예고 없이 꽃을 사 들고 미소 지으며 내 앞에 서 있던 순간들.

그런 장면들이 내 믿음을 더욱 단단히 붙잡아주었는지도 모른다.


“너 없으면 진짜 안 되겠다”며 내 어깨에 기댈 때마다, 나는 그의 사랑을 믿고 싶어졌다.

그의 다정함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고, 그럴 때면 모든 불안정함도 잠시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그의 흔들림마저도 매력이라 착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절은 조용히 흘러갔고, 마음을 기댈 작은 틈조차 점점 사라져갔다.

그러던 무렵, 그의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사업상 문제들이 생겼고, 그는 점점 예민해졌다.

멘탈이 무너진 그는 자신의 일도 내팽개쳤고,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나는 내 일도 빠듯한 와중에 그의 문제까지 끌어안았다.

계약서를 검토하고, 미팅에 대신 나가고,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며 무너져가는 그의 사업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오빠, 원래 똑똑한 사람이잖아. 사람 마음도 휴식이 필요해.

내가 정리하고 있을 테니, 오빠는 좋아하는 야구라도 하고 와. 스트레스 풀어야 다시 일어설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말했고, 진심으로 내조했다.

그가 삶의 바닥을 칠 때,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

진심은 언젠가 닿을 줄 알았고,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의 약속을 자주 잊었고, 감정의 온도는 들쭉날쭉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연락이 없다가도, 갑자기 나타나 "미안해, 일이 좀 많았어"라며 무심하게 웃었다.

나는 서운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내 감정을 자주 삼켰다.


그렇게 애써 넘긴 순간들이 쌓여갈수록, 그의 말과 행동은 점점 더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랑해"라고 말한 다음 날엔 차갑게 돌아서고,

함께 미래를 꿈꾸던 저녁이 지나면 연락이 닿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마치 한 사람 안에 서로 다른 두 계절이 교차하듯, 그의 얼굴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낯선 온도가 드리워졌다.


그처럼 예측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나는 어느새 익숙하게 혼란을 감내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것이 그의 자유로운 성격 때문이라고 믿으려 애썼다.

상처받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했고, 그는 그런 나에게 말했다.


"넌 참 대단해, 이런 나를 감당해주는 거 보면."


나는 그 말에 슬며시 기뻤다.

내가 감당하는 존재일 때, 비로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위험한 감정의 시작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몰랐다.

‘감당해주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내 안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언제부턴가, 예고 없이 차오르고 사라지는 감정의 파도처럼,

그의 변화무쌍한 태도는 나에게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그처럼 반복되는 실망에도 나는 "사랑이니까"라는 말로 내 감정을 덮었다.

그의 불안정함을, 상처를, 피로함을.

마치 그 모든 것이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도 되는 양.


그의 감정은 늘 그렇게 금세 달아오르고, 또 금세 식어버렸다.

오늘은 사랑한다고 안기다가, 다음 날은 이유 없이 차가워졌다.

나는 그런 온도의 차이를 사랑의 방식이라 믿었다.

그가 그렇게밖에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그렇게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헌신이라 여겼고, 그것이 진심이라 믿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사랑이라기보다 구원에 가까운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모순을 감싸 안으며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다.

그의 불안정함은 내가 메워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고, 나는 늘 그의 감정을 먼저 생각했다.

그는 자유롭고 싶어 했고, 나는 그를 붙잡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내 마음을 억눌렀고, 그의 기분에 맞춰 웃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도 나처럼 마음을 열고 변해줄 거라 믿었다.

진심은 결국 전해지는 것이라, 사랑이란 그렇게 서로에게 닿아가는 과정이라,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가을은 천천히 깊어갔고, 우리는 여전히 함께였다.

그리고 나는 그 믿음 안에서, 아직은 따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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