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3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by 디자이너 야니

해가 질 무렵, 회색빛 노을이 창가에 얇게 걸려 있었다.

하루 종일 쉼 없이 움직였지만, 그의 부재는 무심한 공기처럼 내 옷깃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사귀고 있었지만, 말수는 줄었고, 대화보다 침묵이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회의 사이 잠깐의 틈에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나는 자꾸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혹시 하는 기대에 마음이 먼저 반응했지만, 대부분은 업무 메일이나 광고 문자였다.


다시 화면을 꺼두며 허무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메시지를 보낼까 망설였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뭐해?’라는 몇 글자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의 반응 없는 기류 속에서 나는 이미 초조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런 내 마음조차 꺼내보이기 부끄러웠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그가 더 무겁게 느끼지 않을까 겁이 났다.

어쩌면 그는 이미 천천히, 아무 말 없이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집 앞에도 몇 번이나 갔었다.

불 꺼진 창을 올려다보며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유턴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예전엔 불쑥 찾아가도 웃으며 문을 열어주던 그였다.


차가운 밤바람에 코끝이 시려워지던 어느 저녁, 나는 그의 현관 앞에 잠시 멈춰 섰다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벨을 누르는 순간,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피할 것 같은 불안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그의 문 앞에서 조용히 뒷걸음치게 만들 정도로 우리 사이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점점 내 삶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이름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실체는 자꾸만 멀어지는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온기와 눈빛, 웃음과 말투는 여전히 생생했지만, 그것들이 지금의 그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했던 날들마저도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이 가장 슬펐다.




몇 날 며칠 연락이 닿지 않던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결국 참다 못해 내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단답이었고, 그다음엔 읽씹. 답답한 마음에 “우리 한번 보자, 얘기 좀 하자”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고, 몇 번을 더 보내자 그제야 짧게 시간이 정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만남은 내가 끈질기게 보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페 구석, 창가 자리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마치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축 처져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동생이 코인으로 대박 났다길래, 나도 마지막 남은 돈으로 올인했고, 다 날렸어. 그 후로는... 연락할 면목이 없더라. 요즘은 새벽에 물류센터 알바 다녀. 그냥... 버티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시선은 한 번도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책임지려는 의지보다는 상황에 떠밀린 억울함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한참 후에야 그가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나는,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조차 또다시 나를 다치게 할 거란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를 향한 내 마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입술을 깨물며 말을 꺼냈다.

"혹시... 잠깐만, 조금만 도와줄 수 있을까? 나중에 꼭 갚을게."


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빙글 돌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머릿속엔 사랑이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결국 나는 그에게 2천만 원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조건을 걸었다.

그의 집을 담보로 차용증을 쓰는 것. 그건 마지막 남은 나의 방어선이었다.


그는 뜻밖이라는 얼굴을 하며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뭐, 너도 불안하겠지."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말없이 한숨만 쉬었고, 며칠 뒤엔 결국 나에게 말했다.

"근데... 차용증까지 쓰게 할 줄은 몰랐어. 조금 서운했어. 나 믿지 못했던 거야? 내가 너였다면, 그런 조건 없이 빌려줬을 텐데, 아니 그냥 줬을 텐데."


그의 말은 내 가슴에 빗금처럼 그어졌다.

내가 내민 건 ‘믿음의 다리’였는데, 그에게는 ‘불신의 벽’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는 내 진심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완전히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짜증을 '서운함'이라는 감정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순간, 제3자의 눈에는 강지혁이라는 사람의 민낯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아직 콩깍지 안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바보같이도 나는 오히려 내가 너무 냉정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왜 늘, 나의 방어를 죄책감으로 되돌리는 걸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는 자꾸 나를 허물고 있었다.

차용증을 요구했던 내 판단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의 서운하다는 말이 마치 내 잘못처럼 가슴에 박혔고,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나는 그저 그의 말에 상처받은 채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또다시 나를 탓하며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정말 그랬다.

차용증 하나 때문에 마음을 다쳤다는 그 말이, 끝끝내 내 잘못인 것만 같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황망하고도 서글픈 웃음이었다.

자신은 수없이 회피를 반복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돕고 있었는데.

내 진심은 그의 눈엔 거래처럼 보였을까? 그게, 서운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미 그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감정뿐 아니라, 돈까지 얽혀 있었기에 더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마음 한켠에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보상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만큼 했는데, 설마 정말 날 버리겠어?’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더 많이 주었고, 더 오래 참았고, 더 간절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다가설수록 그는 더 멀어졌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냉담했고, 내 기대는 닿기보다 되돌아오기 바빴다.

그럼에도 나는 애써 믿었다. 아니, 믿고 있다는 착각을 스스로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면서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오빠, 우리 그냥 결혼하자. 같이 살면서 빚 갚고, 돈 모으면 되잖아.”

지혁은 대답 대신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은 현실이야. 나 지금 가진 것도 없고, 내 집도 아버지가 사준 거야. 우리 집이 매매가만 30억인데... 부모님은 여자도 최소 3억은 있어야 한다고 했어. 너, 3억 현금 있어?”


순간, 마음 어딘가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말한 건,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자산이었다.

그의 시선은 내 마음이 아닌, 내 가능성을 따지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내가 현금 10억만 있었어도, 널 당장 데려왔을 거야. 지금은 안 돼. 그냥... 좀 기다려줘. 내가 진짜 다시 일어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 조금만 더. 그 말은 익숙했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는 항상 ‘조금만’을 말했고, 나는 항상 ‘이번엔 다를 거야’를 믿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내 마음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다.

예전처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억울함.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는 집착.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을 붙잡고 있는 내 모습조차, 나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으로 눅진하던 어느 밤,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마음 어딘가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 증거를 보고 나서야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야... 이거 니 남친 아니야?'라는 짧은 말과 함께 캡처된 사진 한 장.

화면 속엔 낯익은 남자가 있었다. 소개팅 어플의 프로필 사진.

내가 예전에 여행지에서 찍어준 바로 그 사진. 너무나 익숙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사진이었다.


손끝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 숨이 목구멍에 걸렸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라고, 뭔가 오해일 거라고, 애써 머릿속에서 부정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지혁은 화면을 확인한 뒤, 곧장 정색했다.


"그거 옛날에 그냥 가입했던 거야. 까먹고 있던 건데 지금 왜 떠 있는지도 몰라. 나 요즘 돈도 없고 정신도 없는데, 누굴 만나긴 뭘 만나. 니가 보기엔 내가 지금 그런 상황으로 보여? 그 친구는 뭐야, 예전 일 하나로 뒤집는 거냐고."


그렇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던 그가 잠시 멈추더니,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 날 그렇게 못 믿어? 이런 식으로 의심하고 따지고... 이런 게 사랑이야?”


오히려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냉정해졌다. 분노보다 앞선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믿고 도왔고, 지켜줬고,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잘못은 외면한 채, 되레 내 친구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며 상황을 회피하는 그를 보며, 문득 낯선 기시감이 밀려왔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 맞는 걸까.


그때부터, 내 안엔 아주 작고 낯선 질문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진심은, 정말 통하는 걸까? 아니면 진심을 주는 사람은, 그저 이용하기 가장 쉬운 상대일 뿐인 걸까.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진심이 통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걸 견뎌온 건 아닐까.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질문엔 굳이 답할 가치도 없었다.

사랑을 말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사람에게, 더는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알겠어.”
그 말은 동의가 아니라, 종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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