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8

화면 속 그녀, 손 닿지 않는 빛 (지혁의 시점)

by 디자이너 야니

이 결혼이 오래가지 못하리란 걸,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사랑보다 조건을 먼저 본 건 예전부터였다. 서연에게조차 진심보다 먼저 계산기를 두드렸던 내가, 마음 하나로 누군가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적은 있었을까.


감정보다 숫자에 먼저 반응하던 나였고, 사랑은 언제나 손익분기점 안에서 움직였다.

다만 서연과 헤어진 후, 그 본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배경, 집안, 인맥. 수진은 겉보기에 완벽해 보였고, 나는 기회처럼 그 결혼을 밀어붙였다.

불안은 기대라는 이름으로, 욕망은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핑계로 포장됐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그녀 역시 나와 같았다. 서로의 조건을 믿고 시작한 관계.

처음부터 사랑은 없었다.




나는 수진에게 혼외자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했고, 설령 들키더라도 넘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비밀은 늘 예고 없이, 가장 추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싸웠고 서로를 탓했다.

어느 날 밤, 수진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숨길 수 있어? 혼외자가 있다는 걸, 결혼 전에 왜 한마디도 안 했냐고!"

나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한 번 본 여자야. 술김에 실수였고, 그 여자가 멋대로 낳은 거라고. 10년도 넘은 일인데, 그게 지금 그렇게 중요해? 내가 당신 10년 전 과거 들춰내서 따진 적 있어?"


그 말이 끝나자, 수진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말없이 등을 돌렸고, 그날 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에서 잠들었다.




그 후로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날 믿지 않았고, 나는 끝없이 억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의심받는 일이 반복되면, 차라리 진짜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내 감정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럴수록 서연이 떠올랐다.

모든걸 잃고 무너져있던 시절, 그 모든 부족함을 안고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던 사람. 진심 하나로 날 감싸 안았던 그녀.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했던 걸, 나는 너무 늦게야 알았다.


수진이 짐을 싸던 날, 거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랍을 정리하고 옷을 개는 그녀의 손길은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수진의 짐이 문턱을 넘고, 마지막 신발 한 짝까지 사라지자 현관문은 조용히 닫혔다. 무서울 만큼 정리된 거실엔, 이제 그녀의 흔적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문을 나서기 전, 수진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비겁한 회피자야. 당신은 평생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할 거야."


그 말은 오래도록 공간에 남았다. 나는 그제야, 그 고요 속에서 무언가를 잃었다는 감각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수진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나는 그 상실의 이름을 끝내 붙이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혼자 남은 아파트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수진과 함께일 때도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숨소리, 발소리, 컵 부딪는 소리 같은 일상의 기척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소파에 누워 무심코 리모컨을 들었다.

목요일 밤 11시. 딱히 보고 싶은 방송은 없었지만, 그냥 무언가의 소리가 필요했다.

그때, 채널을 돌리던 손이 멈췄다.


“최근 출간하신 『사랑의 끝에서, 나를 선택했다』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데요.”


문학 토크쇼의 진행자 목소리. 그리고 화면에 비친 한 사람. 서연이었다.

손에서 리모컨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나는 굳은 몸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단단하고, 더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미소,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 빛이 났다. 내 기억 속의 서연은 항상 나를 바라보며 불안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나는 지금 무너져가고 있는데, 그녀는 저렇게 단단하고 평온하다니.

잠시나마 생각했다. 그때 조금만 더 기다려줬다면, 나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 나를 그렇게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덜 비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내 안다. 그 모든 생각 역시 비겁한 회피라는 걸.


진행자가 서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결혼을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결혼 후의 삶은 어떠신가요? 독자들 사이에서 지금의 사랑이 참 궁금하다는 반응이 많았거든요."


서연이 웃었다. 그 미소는 평온했고, 내 눈엔 진심처럼 비춰졌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마치 모든 걸 용서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걸 용서하고 떠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같았다.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에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계. 그래서 편안해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리모컨을 움켜쥐고 TV를 꺼버렸다.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 다른 사람과 함께 평온하다는 그 고백이, 지금의 나에게는 숨조차 쉬기 힘든 통증처럼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꺼진 화면 너머로도 메아리처럼 귀에 맴돌았고, 그 잔향이 사라질 즈음엔 거실 전체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서연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상상 속 어딘가에 조용히 남겨두었던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 말 한마디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선을 그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겁게 몸을 일으켜 구석진 서랍장으로 향했다.


수진조차 모르게 숨겨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서연과의 사진 몇 장, 그녀가 써준 편지, 그리고 가방에 몰래 넣어두었던 노란 포스트잇.


‘오빠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그 글씨를 오래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끝이 떨렸고,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의 나는,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진심을 내민 사람 앞에서, 나는 감정을 가장한 두려움과 책임 회피로 일관했고, 결국 스스로 그 마음을 밀어낸 것이다.


서연은 그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쳤고, 돌아서 버렸다.

그 손이야말로 내가 지켜야 했던 전부였다는 걸, 지금에서야 안다. 너무도 늦게.


나는 사랑을 안다고 착각했던 사람이다. 감정의 불꽃은 있었지만, 그것을 지킬 용기와 책임은 없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기댄 것을 사랑이라 오해했고, 그 마음을 품은 무게를 끝내 모른 척했다.


서연은 사랑의 끝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나는, 늘 나 자신만을 택해왔다. 그러나 내가 선택했던 '나'는 결코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을 감춘 껍데기였고, 책임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처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구했고, 나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서조차 도망치고 있다. 그 차이는 너무 명확했고, 그 인식이 더 깊은 통증이 되어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여전히 감정의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이토록 늦은 순간에야 진심으로 그녀를 선택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선택이 닿을 수 없는 거리 너머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 진실은 말없이 파고들어와, 천천히, 깊고 참담한 아픔이 되어 나를 잠식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주하지 않으려 외면해온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 안에 남아 있는 회피와 두려움, 미성숙한 감정의 잔해들을 인정하는 것. 변화하지 못하더라도, 그 어둠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끝내 짊어져야 할, 너무 늦은 깨달음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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