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아웃소싱, 손절톡이 대화하는 시대

싫지만 끊지 못하는 관계를 대신 살아주는 기계

by 디자이너 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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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웹툰을 보다가 멈칫했다.
웹툰 속의 익숙한 설정이 낯설게 다가왔다.
‘손절톡’이라는 프로그램.


처음엔 누군가를 정중히 차단해주는 기술인가 싶었는데, 내용은 좀 달랐다.

내가 직접 대화하긴 싫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인연을 끊을 수도 없는 관계가 있다.
가끔은 가족이고, 가끔은 회사 동료고, 가끔은 예전의 친구거나, 어중간한 지인일 수도 있다.

‘손절톡’은 그런 관계를 대신 살아주는 프로그램이다.
사용자의 과거 대화 패턴을 학습한 AI가 사용자의 말투, 방식, 호흡대로 그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요즘 어때?"
"응, 그럭저럭. 일은 좀 바빴고."


이건 사용자가 친절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용자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아바타, 손절톡이 대답한 문장이다.

사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절톡에 누군가를 등록했을 뿐이다.
마음은 이미 그 관계에서 멀어졌지만, 상대는 여전히 '사용자'와 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관계는 멈췄는데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어지고 있었다.




감정노동, 이제는 인간이 안 해도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점점 더 감정을 직접 감당하지 않게 될까?


‘말 섞기 귀찮은 관계’를 걸러주는 기술.
‘불편한 감정의 주파수’를 튜닝해주는 AI.
‘형식적인 안부’나 ‘의무적인 대답’을 대신 건네주는 알고리즘.


그건 어떤 면에선 너무나 매력적이다.
지친 날, 감정의 여백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을 때, 굳이 나서지 않아도 관계는 유지되고, 불편함은 필터링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감정의 노동을 아웃소싱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어떤 감정을, 누구에게,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그건 마치 감정이 없는 나를 대신해, 감정을 흉내내는 기계가 관계를 연기하는 일 같았다.



관계는 참기보다 느껴야 하는 일


나는 디자인을 할 때 종종 ‘불편함’에 대해 생각한다.
사용자의 경험에서 어떤 불편은 줄여야 하고, 어떤 불편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으로 남겨두기도 한다.


예컨대, 패스워드를 매번 입력하게 하는 과정은 불필요한 불편일 수 있지만, 누군가의 의견에 댓글을 달기 전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드는 인터랙션은 감정의 진입 장벽이자, 의미 있는 여백일 수 있다.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불편하다고 해서, 모두 다 지워야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내 감정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그 사람의 말투가 버겁게 느껴질 때, 그 사람이 묻는 안부가 피곤할 때, 내가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된다.


AI가 대신 대답하는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는 이미 멀어졌다는 걸 스스로 외면하게 되는 건 아닐까.



기술은 감정을 흉내 내고, 인간은 감정에 머문다


AI는 요즘 너무 인간적이다.
이모지를 적절히 섞고, 쉼표 하나로 뉘앙스를 조율하며, 대답 속에 온기를 심는다.

그건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의 섬세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대리 구현’이기도 하다.


기계가 인간다워지는 동안, 정작 인간은 감정을 직접 다루는 일을 피한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답장을 못했어.”
“무례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말하긴 싫었어.”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게 진심이 아니라고 느껴졌어.”


이런 감정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지만,

손절톡이 실제로 상용화 된다면 더 이상 그런 말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손절톡이 대신 전달하거나, 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관계를 유지시켜줄테니까.


우리는 정말로, 감정이 없어지는 걸까. 아니면, 감정을 느끼는 감각을 그냥 꺼버리는 걸까.




나의 감정을 감당하는 일


나는 디자이너다.
어떤 서비스를 설계하고, 누군가의 경험을 상상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더욱,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감정을 설계할 수 있을까?'
'감정을 프로토타이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을 설계하지 않고, 감정을 우회하는 도구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에서도 그렇다.
답장하기 귀찮은 메시지, 억지로 이어가는 대화, 불편하지만 끊지 못하는 관계.


그 모두를 손절톡 같은 기술로 넘길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효율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한 감정들을 스스로 느끼고, 직면하고, 때로는 잘못 표현하고, 후회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을 잃고 싶지 않다.


그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지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그것만은,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 와도 대신할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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