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민우는 한때 특별한 감각의 세계 속에 살았었다.
숫자는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지녔고, 음악은 색의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사람들의 웃음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방 안을 물들였다.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그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공명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2년 전, 리콜렉스의 기억 조작 사태는 그의 세계를 산산이 부쉈다.
색은 빛을 잃고, 소리는 메마른 메아리로 변했으며, 남은 것은 끝없는 공허였다.
감각은 더 이상 스스로 솟아나지 않았다. 민우는 공명하지 않는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낙서 같은 선과 서툰 색조차, 그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그림들은 처음에는 Hope Bridge 연구소 한쪽 벽에 조용히 쌓였지만, 곧 연구소의 ‘기억 치유 프로그램’의 흐름 속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네오아트 프로젝트와 이어지던 Hope Bridge 연구 교류의 자리에서, 테라콘의 박지원은 그 낡은 선과 색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민우의 감정을 본격적으로 무대 위로 올려보자고.
그리하여 민우는 어느덧 ‘감정을 그리는 작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메울 수 없는 균열이 남아 있었다.
그날도 민우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거대한 홀로그램 캔버스 위, 마지막 빛의 파동이 일렁이며 흘러내렸다.
네오링크를 통해 전송된 그의 감각은 수백 명의 관람객에게 스며들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들이 느낀 건 민우의 어린 시절의 한순간. 봄 햇살 아래 교실 창가에서 마주친 한 소녀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감정의 주인공인 민우의 심장은 고요했다.
"작가님, 오늘 방문자 수가 역대 최고래요. SNS도 난리예요."
큐레이터의 말에 민우는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습된 미소였다.
관람객들이 떠나자, 갤러리 안은 전원을 내린 듯 적막해졌다.
방금 전까지 환호로 가득 찼던 홀은 이제 공허한 무대처럼 비어 있었다.
홀로그램의 잔광만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그때 유리창 너머, 골목 끝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낡은 간판 밑의 화방이었다. 폐업 직전처럼 초라했지만, 등불은 묘하게 따뜻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민우의 발걸음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곳을 향했다.
문이 열리자 종소리가 울렸다.
크레파스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갤러리의 차갑고 정제된 공기와는 전혀 다른, 살아 있는 냄새였다.
구석 책상에 앉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열 살 남짓, 손가락에는 크레파스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맑았다. 그 순간, 소녀의 눈빛이 민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떨림으로 요동쳤다.
작품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지금 이 낯선 소녀의 눈을 통해 밀려온 것이다.
민우는 혼란을 숨기며 물었다.
"뭘 그리고 있니?"
소녀는 종이를 내밀었다.
검은색과 빨강이 부딪히며 휘몰아치고, 그 한가운데 노란색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화날 때 그려요. 안 그리면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민우의 숨이 멎었다. 점수도, 데이터도, 평가도 없는 그림. 단지 견디기 위해 그린 그림이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오래전, 자신도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는 걸 떠올렸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단지 살아 있기 위해 선을 그었던 기억.
"서툴지만... 살아 있네." 민우가 중얼거렸다. "너의 그림은 살아 있어."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이름이 뭐니?" 민우가 다정하게 물었다.
"유나예요. 서유나." 소녀는 환하게 대답했다.
민우는 유나라는 소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깥에서는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화방 안에서만큼은, 진짜 빛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는 찬 공기를 맞으며 밖으로 나왔다. 가슴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문을 나서자, 겨울빛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