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과 동요
새벽 6시, 민우는 희미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꿈에서도 어젯밤 본 소녀의 그림이 아른거렸다.
검은색과 빨강이 부딪히며 요동치던 선들이,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세면대 앞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자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비쳤다. 눈빛은 무뎌져 있었다.
2년 전 사고 이후 달라진 건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조금씩,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유나였나? 그 아이 이름이…'
어젯밤 만난 소녀의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
"화날 때 그려요. 안 그리면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테라콘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테라콘으로 향하는 길, 민우는 스마트폰으로 전시 후기들을 넘겨봤다.
"윤민우 작가의 '봄날의 기억'에서 진짜 벚꽃 향기를 맡았어요. 눈물이 났습니다."
"감동지수 89점! 역시 S급 작가네요."
"이렇게 완벽한 감정 체험은 처음이에요. 별 다섯 개!"
평점은 4.8점.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민우의 마음은 무거웠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기계음들이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예전엔 각 소리마다 고유한 자신들만의 색깔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3번은... 연한 초록색이었지. 7번은 오렌지빛이었고.'
그 잃어버린 세계가 그리워 눈을 감았지만, 보이는 건 칠흙같은 어둠뿐이었다.
테라콘 4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인공향이 한기를 뿜으며 차갑게 코끝을 스쳤다.
언제나와 같은 냄새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역겨웠다.
어젯밤 화방의 종이 냄새가 더 선명히 그리워졌다.
"민우씨, 일찍 오셨네요."
연구실로 들어서자, 팀장 강수란이 컵라면을 후루룩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깊어진 다크서클이 그녀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박지원 CEO님이 10시에 보자고 하시던데요. 뭔가 큰 건 있나 봐요.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출근하셨거든요."
민우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박지원의 부름이 좋은 소식일 리는 없었다.
지난 몇 달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연구실 한편에서는 개발자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감정 분석 엔진 v3.2' 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뭘 하고 있었어요?" 민우가 물었다.
"아, 새로운 감정 평가 시스템이요. AVA라고 불러요." 한 개발자가 대답했다.
"감정을 더 정확하게 수치화하고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이죠. CEO님이 직접 설계하셨어요."
화면에는 수십 개의 복잡한 그래프들이 서로 뒤엉켜서 춤추고 있었다.
감동지수, 공감력, 지속도, 강도... 감정이 잘게 쪼개져 실험 표본처럼 나열돼 있었다.
민우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오전 10시.
박지원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지원이 환한 미소로 일어나 맞았다.
그녀의 사무실은 언제나 완벽했다. 적당한 온도, 은은한 조명, 그리고 벽면에 걸린 최신 네오아트 작품들이 은은하지만 화려하게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민우씨, 어제 전시 대성공이었어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짧게 대답했다.
"앉으세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박지원이 홀로그램 패널을 켜자, 전 세계 지도가 펼쳐졌다.
여러 도시에 붉은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뉴욕, 런던, 도쿄, 파리. 모두가 민우씨 작품 전시를 원합니다.
특히 뉴욕 MOMA에서는 개인전 제안까지 왔어요.”
민우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MOMA 개인전이라니. 모든 예술가의 꿈이었다.
"하지만," 박지원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지금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작품 수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민우의 최근 작품들이 화면에 뜨자, 하락하는 감동지수 그래프가 눈에 들어왔다.
“6개월 전 95점에서 지난주 87점까지. 이유가 있나요?”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
자신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듯한 불안.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지원이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해외 진출이 힘들어요. 감정의 순도가 떨어지고 있거든요."
"순도요?"
"네. AVA 시스템으로 분석해보니, 민우씨의 감정 데이터에 노이즈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마치...
머뭇거림이나 의심 같은 것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민우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머뭇거림이나 의심. 그것들이 노이즈라니.
"그래서 제안이 있어요."
박지원은 새로운 서류를 내밀었다. 표지에는 굵은 글씨가 써 있었다.
‘감정 정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거치면, 민우씨의 감정을 더 순수하게 추출할 수 있어요.
불필요한 잡념이나 의심을 걸러내고, 핵심 감정만 남기는 거죠."
민우는 서류를 넘기며 읽었다.
복잡한 의학 용어들과 기술적 설명들이 빼곡했지만, 요약하면 간단했다.
그의 뇌에서 '순수한' 감정만 추출해서 작품으로 만드는 것.
"부작용은 없나요?"
"걱정 마세요. 이미 다른 작가들이 성공적으로 거쳤어요.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다고 하더라고요.
창작에 방해가 되는 잡념들이 사라지니까."
박지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 속에서 민우는 집착과 열정이 뒤섞인 섬뜩함을 보았다.
"시간은 얼마나 걸려요?"
"일주일 정도. 그 후에는 전보다 훨씬 강력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아마 민우씨가 그토록 원하던..."
박지원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민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민우씨의 예전 감각을 되 찾을 수도 있을지 몰라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예전 감각. 잃어버린 색과 소리의 세계를 다시 되 찾을 수 있다니...
"정말... 가능한가요?"
"물론이에요. 감정 정화 과정에서 뇌의 감각 영역도 함께 활성화시키거든요.
이미 몇몇 작가들이 새로운 감각 능력을 얻었어요."
서류 뒤쪽에는 성공 사례들이 적혀 있었다.
'시각적 공감각 회복', '청각 증폭 효과', '후각 연결성 강화’
“민우씨는 동의서에 서명만 하시면 되요. 그럼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박지원이 펜을 내밀었다.
그토록 그리워한 세계... 손이 떨렸다.
민우는 펜을 잡을 뻔했지만, 알 수 없는 저항감이 그의 손끝을 가로막았다.
오후, 민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주머니 속 동의서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예전 감각, 세계적인 작가, 완벽한 조건들.
하지만 동시에 불안이 짙게 드리웠다.
'감정 정화'…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박지원의 제안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전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숫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음악이 색깔로 보인다면...
그의 발걸음은 저절로 어제 갔던 골목으로 향했다.
화방의 작은 불빛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 종소리가 울렸다.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 어제 그 아저씨!"
"안녕, 유나야."
"오늘도 그림 보러 왔어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새로운 그림을 꺼냈다. 어제와는 다른 그림이었다.
파란색과 초록색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요. 할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셨거든요."
민우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놀랐다.
어제의 격정적인 그림과 완전히 달랐지만, 똑같이 살아있었다.
감정이 변했고, 그림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유나야, 너는 그림 그릴 때 뭘 생각해?"
"음... 그냥 마음대로 그려요. 기분이 파란색 같으면 파란색으로, 빨간색 같으면 빨간색으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 봐 걱정 안 해?"
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걱정해요? 제 마음인데."
그 순간 무언가가 민우의 가슴을 찔렀다.
단순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진실. 유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저씨는 그림 그릴 때 걱정해요?"
민우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요즘엔 그림을 그릴 때마다 걱정이었다.
점수는 어떻게 나올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박지원은 뭐라고 할까...
"조금..."
"그럼 재미없겠어요. 걱정하면서 그리면 그림도 걱정할 거예요."
유나의 말이 민우의 마음을 후벼팠다. 그림도 걱정할 거라니.
"유나야, 만약에 누군가가 네 그림을 더 예쁘게 만들어준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더 예쁘게요?"
"응. 색깔도 더 선명하게 하고, 선도 더 매끄럽게 하고..."
유나가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제 그림이 아니잖아요."
"왜?"
"제가 그린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이 고친 거잖아요."
민우는 말문이 막혔다. 열 살 아이가 자신보다 명확하게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저씨, 혹시 누가 아저씨 그림을 고치려고 해요?"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주머니 속 동의서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유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오늘 그린 그림을 조심스레 민우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아저씨께 드릴게요. 제 마음이에요."
민우는 그림을 받아 들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거칠지만 살아 있는 선과 색이 손끝에 전해졌다.
저녁 8시, 민우는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박지원이 준 동의서가 놓여 있었다.
'감정 정화 프로그램 참여 동의서'.
그 옆에는 유나가 오늘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유나는 우울해 보이는 민우에게 조심스레 그림을 건네주었다.
파란색과 초록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평범하지만 따뜻한 색채였다.
두 장의 종이 사이에서 민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예전 감각을 되찾고 세계적인 작가가 될 기회. 박지원의 제안은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유나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제가 그린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이 고친 거잖아요."
만약 감정 정화 프로그램을 거친다면, 그 후의 작품들은 정말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기계가 정화한, 인공적인 감정의 산물일까?
민우는 스마트폰을 들고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민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응, 민우야! 무슨 일이야?"
"물어볼 게 있어. 만약에... 만약에 예전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전화 너머로 민서의 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혹시 테라콘에서 뭔가 제안했어?"
민우는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박지원의 제안, 감정 정화 프로그램, 그리고 자신의 혼란.
민서는 한참을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민우야, 네가 정말 되찾고 싶은 게 뭐야?"
"예전 감각... 나의 숫자 친구들과 색이 있는 세상..."
"그것만?"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민우야, 너는 예전 감각을 잃었을 때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어. 그때 왜 그림을 그렸는지 기억해?"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그래.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그런데 지금 네가 하려는 건 뭐야?
살아있는 감정을 기계로 정화시키는 거잖아."
민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민우야, 내가 처음에 네오링크를 만든 이유가 뭔지 알아?
너의 특별한 세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그 반대가 되어버렸어.
사람들의 감정을 기계에 맞게 바꾸려고 하고 있어."
민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계속 메말라가기만 하면?"
"음... 민우야, 혹시 요즘 뭔가 특별한 일 없었어?"
민우는 유나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의 맑은 눈빛, 자연스러운 그림, 그리고 "제 마음인데"라고 했던 말.
"있었어."
"그럼 그게 답이야. 기계에서 찾지 말고, 살아있는 것에서 찾아."
전화를 끊고 나서, 민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네온사인들이 번쩍이고 있었지만, 그 빛들은 차가웠다.
탁자 위에는 유나가 건네준 그림이 놓여 있었다.
파란빛과 초록빛이 서툴지만 따뜻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민우는 그 종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민우는 동의서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유나의 그림 옆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장의 종이를 잠시 번갈아 본 뒤, 동의서를 서랍 안에 넣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