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A와 등급화의 시작
일주일 후, 테라콘 본사 42층 대회의실.
박지원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러분, 드디어 AVA 시스템이 공식 런칭됩니다."
거대한 스크린에 'AVA (Affective Visualization Agent)'라는 로고가 떠올랐다.
세련된 디자인과 함께 복잡한 그래프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민우는 회의실 한쪽에 앉아 박지원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그는 박지원이 제안한 감정 정화 프로그램 참여에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지 않고 있었고,
그 후로 박지원과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차가운 것이 감춰져 있었다.
"AVA는 단순한 감정 분석기가 아닙니다."
박지원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발표 자료 옆에 끼워둔 낡은 종이 한 모서리에, 아이가 그린 그림이 스쳐 보였다.
그녀의 손끝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지만, 곧 다시 차분해졌다.
"감정의 질을 평가하고, 시장 가치를 측정하며, 최적의 소비 방식을 제안하는 종합 시스템입니다."
화면이 바뀌자 민우의 최근 작품들이 나타났다.
각 작품 옆에는 상세한 분석표가 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자장가' - 감동지수 91점 (A등급), 시장가치 3억 2천만 원
'봄날의 기억' - 공감력 87점 (B+등급), 시장가치 2억 8천만 원
'그리운 향기' - 순도 84점 (B등급), 시장가치 2억 1천만 원
민우는 자신의 기억들이 점수와 가격표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속이 메스꺼워졌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감정의 순도입니다."
회의실 벽면 LED에 실시간 피드가 겹쳐 떴다.
해외 바이어들의 채팅과 주가 틱커가 요란하게 흘러갔다.
임원들은 그래프보다 그 숫자들을 더 열심히 봤다.
"AVA는 작품 안에 섞여 있는 불순물을 정확히 감지합니다."
화면에 새로운 그래프가 나타났다.
빨간색 선이 민우의 최근 작품들의 '순도 하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윤민우 작가의 작품 순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초기 95%에서 현재 84%까지."
회의실 안의 임원들이 웅성거렸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죠?"
"다행히 AVA에는 '감정 정화' 기능이 있습니다."
같은 시각, 로비.
고객 응대원이 같은 설명을 세 번 반복하고 있었다.
“왜 제 감정에서 불안한 부분이 다 지워진 거죠? 그게 진짜 제 마음인데!”
“남편 기억 속 웃음이 다 똑같이 처리돼 있어요. 기계가 제 감정을 잘라냈다구요!”
항의가 이어졌지만, 안내 데스크의 화면 속 홍보 영상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회의실 스크린이 다시 밝아졌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핵심 감정만 추출해내는 거죠."
박지원의 시선이 민우에게 향했다.
"윤민우 작가님, 이제 결정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민우에게 집중됐다.
그는 목구멍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생각해볼 시간을..."
"시간이 없습니다."
박지원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이미 해외 바이어들이 기다리고 있고, 다른 작가들은 벌써 정화 프로그램을 완료했어요."
화면에 다른 작가들의 '개선' 사례가 나타났다.
모든 지표가 향상된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들이었다.
"작가 김지혜, 순도 92%에서 98%로 향상. 작가 이수민, 감동지수 78점에서 94점으로 상승."
"이들의 작품은 모두 S등급을 받았고, 해외 수출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우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동료 작가들이 이미 '정화'를 받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복도에서 박지원이 민우를 불러 세웠다.
"민우씨, 솔직히 말하죠. 지금 상태로는 더 이상 메인 작가로 밀어주기 어려워요."
박지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난주까지의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작가들은 모두 성장하고 있는데, 민우씨만 과거에 머물러 있어요.
순도 84%로는 C등급밖에 못 받아요."
"C등급이면..."
"시장에서 퇴출이나 마찬가지죠. 누가 C등급 작품을 사겠어요?"
민우는 벽에 기대고 싶었지만 참았다.
"민우씨, 저는 민우씨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박지원이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표지에는 '최종 통보서'라고 적혀 있었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감정 정화 프로그램을 받거나, 아니면 계약 해지입니다."
민우는 서류를 받아들지 못했다.
"선택은 민우씨 몫이에요. 하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아두세요."
박지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점심시간, 민우는 혼자 회사 근처 공원에 앉아 있었다.
도시락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입맛이 없었다.
'일주일.'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예술 인생이 결정될 예정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AVA 등급제'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감정에도 객관적 평가 시대 열려"
"A등급 작품들, 해외서도 호평"
"C등급 이하 작품들,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
한 기사를 클릭해서 읽어봤다.
'AVA 시스템 도입 이후, 소비자들은 등급을 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B등급 이하 작품들의 관람률은 70% 이상 급감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 감정도 품질관리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평가했다.'
민우는 스마트폰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 구름들도 각각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하얀 덩어리들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옆에 앉았다. 한수연이었다.
"민우씨, 여기 있었네요."
"수연씨... 어떻게..."
"찾고 있었어요. 얘기 들었어요. AVA 등급 문제."
한수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수연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정화 프로그램."
"솔직히 말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위험하다고요?"
한수연이 작은 태블릿을 꺼냈다. 그래프와 차트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건 Hope Bridge에서 독자적으로 조사한 자료예요.
정화 프로그램을 받은 작가들의 뇌파 변화를 분석한 거죠."
그래프를 보니, 모든 작가들의 감정 파장이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정화 전에는 각자 고유한 패턴을 보이던 작가들이, 정화 후에는 거의 동일한 패턴을 보여요.
마치... 같은 사람이 된 것처럼요."
민우의 등에 차가운 것이 흘렀다.
"그리고 이것도 보세요."
한수연이 다른 화면을 띄웠다. 감정 인식 테스트 결과였다.
"정화를 받은 작가들은 모두 일상적인 감정 인식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어요.
기쁨, 슬픔, 분노... 기본적인 감정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됐어요."
"그럼... 그럼 그들은?"
"작품을 만들 때만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그것도 AVA가 제공하는 패턴 안에서만."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감정 정화가 아니라 감정 박탈이었다.
"왜 이런 걸 박지원 CEO는 모르나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겠죠."
한수연의 목소리가 낮게 흔들렸다.
"박지원 CEO는 예전에 강태우와 싸울 때, 우리와 함께 통제의 위험을 똑똑히 봤어요.
그래서 그때는 자기 커리어까지 걸고 우리와 함께 강태우를 막아섰던 거죠.
본심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민우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마도... 지수를 잃은 상처가 여전히 깊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CEO가 된 후, 기업의 압박 속에서 그 트라우마가 다시 고개를 든 거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두면 또 누군가 무너질 거라는 두려움... 그
게 그녀를 다시 '통제'로 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민우의 손끝이 떨렸다.
"그럼... 정화 프로그램도..."
"네. 그녀 자신은 그걸 선의라고 믿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수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수연이 태블릿을 덮으며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감정을 죽여버리고 있죠.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오후 4시, 민우는 다시 화방을 찾았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방은 평소와 달랐다. 문 앞에 '임대료 연체로 인한 퇴거 통보서'가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유나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크레파스들을 상자에 담고 있었다.
"유나야, 무슨 일이야?"
"아저씨... 이제 우리는 여기서 나가야 해요."
유나의 목소리가 작았다.
"임대료를 못 내서?"
"네. 할머니가 아프셔서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민우의 가슴이 아팠다.
AVA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수치로 환산하고 있는데, 유나는 진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있었다.
"어디로 갈 거야?"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찾아보고 계시는데..."
유나가 마지막 그림들을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
"이 그림들은 어떡하죠? 너무 많아서 다 가져갈 수 없어요."
상자 안에는 수십 장의 그림이 있었다. 모
두 유나가 그린 것들이었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하루하루 그린 소중한 기록들이었다.
민우는 문득 생각났다.
자신의 '어머니의 자장가' 작품이 3억 2천만 원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그 돈이면 이 화방을 몇 년이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수연의 말도 떠올랐다.
정화 프로그램을 받으면 자신도 감정을 잃게 될 거라는 것.
"유나야."
"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네 그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여준다고요?"
"응. 많은 사람들이 너의 그림을 보고 감동받을 수 있게."
"그럼... 돈을 벌 수 있어요?"
"아마도. 하지만..."
민우는 망설였다.
유나의 그림을 AVA 시스템에 넣는다는 것은, 그 순수한 감정들을 점수와 등급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 네 그림이 변할 수도 있어."
"어떻게 변해요?"
"음... 점수가 매겨지고, 등급이 정해지고... 사람들이 점수를 보고 평가하게 돼."
유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제 그림은 점수 받으려고 그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린 거예요."
민우는 또 한번 유나의 명료함에 놀랐다.
"그럼 어떡해?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괜찮아요."
유나가 상자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어디 가서도 그림은 그릴 수 있어요. 종이랑 크레파스만 있으면 되니까."
그 순간 민우는 깨달았다.
유나에게는 장소나 도구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반면 자신은? 첨단 장비와 시설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나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네."
"만약에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어? 네가 저번에 본 내 작품을... 기계가 더 멋지고 비싸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난 내 작품을 기계에게 주어야할까?"
유나는 잠시 민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저씨는 왜 그림을 그려요?"
"기억 속에 소중한 친구들이 있어... 지금은 만나지 못하는... 그 친구들이 그리워서 그렸던 것 같아."
"지금은요?"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점수를 받기 위해?
"그냥 예전처럼 아저씨의 마음을 자유롭게 그리면 돼요."
유나의 답은 단순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저씨, 현실이 뭐예요?"
"돈, 생활, 미래..."
"그것들도 중요하지만,"
유나가 마지막 그림을 상자에 넣으며 말했다.
"마음도 현실이에요. 아저씨 마음이 아프면 그것도 현실이고, 기쁘면 그것도 현실이에요."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화방을 나서기 전, 유나가 종이에 번호를 적어 건넸다.
“혹시… 또 고민이 생기면 전화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민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종이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 8시, 민우는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박지원이 준 최종 통보서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한수연이 보여준 자료들을 프린트한 종이들이 있었다.
정화 프로그램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그래프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유나가 마지막으로 그려준 그림이 있었다.
화방을 떠나면서 "아저씨 주는 거예요"라며 건넨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는 큰 사람, 하나는 작은 사람.
큰 사람은 복잡한 선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작은 사람은 단순하지만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민우는 그 그림을 보며 자신을 봤다. 복잡한 선들에 둘러싸인, 길을 잃은 큰 사람.
스마트폰이 울렸다. 박지원의 메시지였다.
"민우씨, 내일까지 답변 주세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민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유나의 그림을 다시 펼쳤다.
그림 속 작은 사람은 웃고 있었다.
큰 사람과 달리, 복잡한 선에 묶이지 않고 자신만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민우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했다.
2년 전 사고 이후 처음으로,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약하지만 분명한, 자신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