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링크3 : 감정의 예술 #4

현실의 무게와 선택

by 디자이너 야니

다음 날 아침.

민우는 유나가 떠난 화방 앞에 서 있었다.

문에는 여전히 '임대 만료'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텅 빈 공간이 보였다.


어제까지 크레파스 냄새가 가득했던 곳이 이제는 먼지와 쓸쓸함만 남아 있었다.

민우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유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테라콘으로 이동하는 길에서도 계속 그 생각이 났다.

점수나 등급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색깔로 그림을 그리던 유나.

이제 어떤 곳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테라콘 42층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개발팀 사람들이 모니터 앞에서 급하게 무언가를 수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민우가 팀장 강수란에게 물었다.

"아, 민우씨. AVA 시스템에 버그가 발견됐어요. 일부 감정 데이터가 왜곡되어서 나타나고 있어요."


모니터를 보니 이상한 그래프들이 춤추고 있었다.

평소에는 매끈한 곡선을 그리던 감정 패턴들이 지글지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작품에서 발생한 거예요?"

"그게... 정화 프로그램을 받지 않은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서만 나타나고 있어요."


수란이 화면을 바꿨다.

민우의 최근 작품 데이터가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그래프가 들쭉날쭉했다.

"민우씨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AVA가 분석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요."


그 순간 한 개발자가 외쳤다.

"팀장님, 이거 버그가 아닌 것 같아요!"


"뭐라고?"

"정화 받지 않은 작가들의 감정 패턴이 너무 복잡해서 AVA가 처리를 못 하는 거예요.

시스템 한계를 넘어선 거 같아요."


수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정화를 받지 않으면 아예 작품을 낼 수 없다는 얘기네요."


민우의 가슴이 철렁했다.

정화를 거부하면 시스템 자체가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전 10시, 박지원의 사무실.

민우는 마지막 면담을 위해 불려왔다.


"민우씨, 들었을 거예요. 시스템 문제."

박지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정화를 받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은 더 이상 시스템에서 처리할 수 없어요. 너무... 불순물이 많아서."

"불순물이라고 하시면..."

"복잡한 감정들이요. 의심, 망설임, 갈등... 그런 것들이 순수한 감정 전달을 방해해요."


박지원이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보세요. 정화를 받은 작가들의 작품은 모두 깔끔하게 분석이 되고 있어요."


화면에는 정화를 받은 작가들의 작품 평가가 나와 있었다.

모두 A등급 이상이었고, 사용자 평점도 4.8점 이상이었다.


"반면 정화를 받지 않은 작가들은..."

다음 화면에는 민우를 포함한 몇몇 작가들의 평가가 나와 있었다.

모두 C등급 이하였고, 평점도 3점대였다.


"사용자들이 혼란스러워해요.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해요."

민우는 목이 말랐다.

"민우씨,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정화 프로그램을 받으시겠어요?"

박지원이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조건이 더 좋아져 있었다.


"해외 진출 확약, 개인 스튜디오 제공, 그리고..."

박지원이 미소를 지었다.

"비용 두 배 인상."


숫자들이 민우의 눈을 어지럽혔다.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거절하시면..."

박지원의 미소가 사라졌다.


"오늘부로 계약 해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갤러리도 민우씨 작품을 받지 않을 겁니다.

AVA 시스템에 호환되지 않는 작품은 시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거든요."


민우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선택지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


"답변은?"

민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한수연이 급하게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긴급한 일이 생겨서..."

"수연씨? 여긴 왜..."


한수연이 태블릿을 박지원 앞에 내밀었다.

"이걸 보세요. 정화 받은 작가들에게서 심각한 부작용이 발견됐어요."

화면에는 병원 진단서들이 나와 있었다.


"김지혜 작가, 급성 감정둔마 증후군. 이수민 작가, 정서적 해리 장애.

모두 정화 프로그램 이후 발생한 증상들이에요."

박지원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일시적인 부작용일 뿐입니다."

"일시적이 아니에요."


한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작가들이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아무것도."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이제 기계가 만든 감정만 재현할 수 있어요. 자신의 진짜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박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세요. 지금 당장."

"박지원 CEO님,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당신이 만든 시스템이 사람들의 감정을 파괴하고 있어요."

"나가라고 했습니다!"

박지원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그 순간 민우는 그녀의 눈에서 뭔가를 봤다. 공포였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


한수연이 나간 후, 사무실은 정적에 싸였다.

"민우씨."

박지원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선택하세요."




점심시간, 민우는 혼자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유나가 살던 골목이 보였다. 이제는 빈 화방만 남은 골목.

그 옆으로는 새로운 네오아트 갤러리가 건설되고 있었다.


민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유나의 번호를 눌렀다.

지난번 화방을 떠나며 유나가 적어준 그 종이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유나야, 나야. 지금 어디 있어?"

"아, 아저씨! 지금 새 집이에요. 작지만 괜찮아요."

"그림은 그리고 있어?"

"네! 여기 벽에다 그리고 있어요. 할머니가 괜찮다고 하셨어요."


유나의 밝은 목소리가 민우의 가슴을 울렸다.

"유나야, 하나만 물어볼게. 만약 네가 정말 소중한 걸 지켜내려면,

대신 그림을 포기해야 한다면...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전화 너머로 유나의 숨소리가 들렸다.

"음... 잘 모르겠어요. 그림을 포기하면 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저씨,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왜?"

"살아있다는 걸 느끼려고요. 그림을 그릴 때 제일 저답거든요."

민우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만약에 그림을 포기하면... 저는 죽은 거 아닐까요? 몸은 살아있어도."

유나의 말이 민우의 마음을 관통했다.


"아저씨도 그림 그릴 때 제일 아저씨답지 않아요?"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그릴 때 자신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아저씨 목소리가 슬퍼요."


민우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유나야, 고마워. 네 덕분에... 답을 찾은 것 같아."




오후 3시, 민우는 다시 박지원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마음이 점점 단단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하셨어요?"


민우는 책상 위의 계약서를 바라봤다.

그 화려한 조건들, 보장된 미래, 안정적인 삶.


하지만 그 옆에는 자신이 주머니에서 꺼낸 유나의 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이 그려진, 단순하지만 진실한 그림.


"네, 결정했어요."

"좋아요. 그럼 여기 사인을..."

"거절할게요."


박지원의 손이 멈췄다.

"뭐라고요?"


"감정 정화 프로그램을 거절합니다."

박지원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이유가 뭐죠?"


민우는 유나의 그림을 들어 올렸다.

"이 그림을 보세요."

"...뭔가요, 이건?"


"한 아이가 그린 그림이에요. 점수도, 등급도 없는 그림이지만...

이 안에는 진짜 마음이 들어있어요."


박지원의 시선이 잠시 그림 위에 머물렀다.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의 그림이라고요?"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입술 끝이 굳어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 유치한 낙서와 당신의 미래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민우가 단호히 대답했다.

"제 미래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 순간, 박지원의 손끝이 무심히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 눈빛은 그림 속 단순한 선과 색을 떠나지 못했다.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지수가 그리던 숫자 친구들이 스쳐갔다.

원을 그리며 춤추던 3과 7, 별이 노래한다고 말하던 아이의 목소리.


박지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민우 씨, 이상은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후회하지 않아요."

민우의 목소리가 확고해졌다.

"오히려 지금까지 제 감정을 속이고 살아온 것을 후회해요."


박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끝입니다. 오늘부로 계약 해지, 그리고... 그리고 뭐든지 하세요."


민우가 돌아서려는데 박지원이 말했다.

"민우씨, 정말 모르겠네요. 당신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민우가 돌아서서 박지원을 바라봤다.

"파괴하는 게 아니에요. 되찾는 거예요."

"뭘요?"

"제 자신을요."




테라콘을 나오면서 민우는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2년 만에 처음 느끼는 자유로움이었다.


길을 걸으며,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AVA 관련 기사들이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AVA 등급제, 해외에서도 큰 호응"
"감정 산업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나"


하지만 그 사이에 다른 기사도 있었다.


"감정 정화 프로그램 부작용 논란... 예술가들 건강 우려"
"'진짜 감정을 되찾자' 시민단체 결성"


민우는 마지막 기사를 클릭해봤다.


'Hope Bridge 연구소 한수연 박사는
"감정은 정화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인간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동조하는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Real Emotion' 운동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진짜 감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저녁 7시, 민우는 새로운 곳을 찾아갔다.

유나가 이사간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문화센터였다.


"유나야!"

"아저씨! 왜 여기 왔어요?"


유나가 반갑게 뛰어왔다.

손에는 여전히 크레파스가 묻어 있었다.


"새로 시작하려고. 너처럼."

"새로 시작해요?"

"응. 다시 진짜 그림을 그리려고."


유나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로요? 그럼 여기서 같이 그려요!"


문화센터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점수 없어요."

유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곳이에요."


민우는 빈 종이를 앞에 두고 크레파스를 집어들었다.

오랜만에 잡는 크레파스의 감촉이 거칠고 따뜻했다.


무엇을 그릴까?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점수를 받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면, 평가받지 않을 그림이라면, 무엇을 그려야 할까?


"아저씨, 뭘 그릴 거예요?"

"잘 모르겠어."

"그럼 마음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세요."


유나의 조언을 따라 민우는 눈을 감았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점, 작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

'점수 걱정하지 않고 그리고 싶다.'

'나답게 그리고 싶다.'


민우는 눈을 뜨고 크레파스를 종이에 댔다.

첫 번째 선이 그어졌다. 서툴고 떨리는 선이었지만, 온전히 자신의 선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선이 이어졌다. 어떤 패턴이나 계획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색깔을 골랐다. 파란색.

왜 파란색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파란색이 필요했다.


점점 그림이 형태를 갖춰갔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무언가가 종이 위에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예뻐요!" 유나가 감탄했다.

"정말?"

"네. 아저씨 마음이 보여요."


민우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봤다.

기술적으로는 형편없었다. 선도 삐뚤고, 색칠도 덜 됐다.

AVA에서는 아마 D등급도 못 받을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이게... 이게 내 그림이구나."

처음으로, 진짜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그날 밤, 민우는 집에 돌아와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던 스케치북이었다.


첫 페이지에 오늘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려봤다.

기억에 의존해서, 느낌에 의존해서.

그리면서 문득 깨달았다.

2년 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각들이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었다는 것을.

다만 기계와 점수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크레파스가 종이를 긁는 소리에서 희미한 색깔이 느껴졌다.

연한 초록색이었다.

파란색을 칠할 때는 시원한 바람 같은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완전하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민우는 스케치북에 적었다.


'1일차. 다시 시작하는 날. 오늘 나는 진짜 그림을 그렸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오아트 갤러리들의 화려한 네온사인들도 있었고, 작은 집들의 따뜻한 불빛들도 있었다.


민우는 그 중에서 작은 불빛들을 더 오래 바라봤다.

그 안에서 누군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유나처럼, 자신답게.


스마트폰이 울렸다. 한수연으로부터 메시지였다.


"민우씨, 들었어요. 용기 있는 결정이었어요.
Hope Bridge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진짜 감정을 지키는 일이에요."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네, 관심 있어요! 내일 찾아뵐게요."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민서에게.


"누나, 나 다시 시작하려고 해. 진짜로."


곧바로 답장이 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민우야. 넌 해낼 수 있어. 늘 그래왔듯이."


민우는 스케치북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평온한 잠이 올 것 같았다.

오늘 밤 꿈에서는 유나가 나타날 것 같았다.

크레파스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아저씨, 오늘은 뭘 그릴 거예요?"라고 물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을 그릴 거야."

그 말은 꿈속에서뿐 아니라, 깨어난 아침에도 여전히 그의 가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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