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노래

보이지 않는 장면을, 들리게 만드는 일

by 디자이너 야니


서랍 속에 잠든 이야기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소설이 있다.

누구의 피드에도, 어떤 플랫폼에도 올라가지 않은 채

내 노트북과 작업실 공기 속에서만 숨 쉬고 있는 이야기.


나는 그 원고를 쓰다가 한 장면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등장인물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


정확히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자신의 시간을 꺼내 놓는 순간이었다.
28년의 밤을 통과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을 향해 낮의 언어로 고백하는 장면.


가사를 먼저 썼다.
소설 안에서는 몇 줄이면 충분했다.

인물의 마음을 설명하는 장치로서의 노랫말.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몇 줄이 나를 붙잡았다.


문장은 완성됐는데, 장면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건 읽히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이 장면은 보여야 했고, 들려야 했고,

어쩌면 공기처럼 스며들어야 했다.


활자는 평면이다.
그 안에 입체를 만들어 넣는 건,

결국 쓰는 사람의 몫이다.




나는 소리보다 먼저 장면을 본다


나는 글을 쓸 때 소리보다 먼저 화면을 본다.

빛의 각도, 그림자의 길이, 공기의 밀도.


인물이 서 있는 위치와 그 주변을 감싸는 색감이 먼저 떠오른다.

어떤 장면은 노을처럼 번지고,

떤 장면은 형광등 아래에서 창백하게 굳어 있다.


나는 그런 감각들을 충분히 통과한 뒤에야 문장을 쓴다.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향을 직접 풍길 수도 없다.
소리를 실제로 들려줄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집요해진다.


한 문장 안에 빛을 숨기고,
단어 하나에 온도를 담고,
쉼표 하나에 숨 고르는 시간을 설계한다.


독자가 ‘읽는’ 것이 아니라 ‘보게’ 만들기 위해.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자기만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


그날도 그랬다.
노래가 필요한 장면을 쓰면서 나는 멜로디보다 먼저 무대의 색을 떠올렸다.

카메라 조명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그림자,

마이크를 잡은 손끝의 미세한 떨림,

오랜 시간을 견딘 사람에게서만 나는 정갈한 공기.


그는 어떤 조명 아래 서 있어야 할까.
어둠은 어디까지 남겨두어야 할까.
목소리는 얼마나 절제되어야 설득력이 생길까.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으니까.




흥얼거림을 프롬프트로 번역하다


결국 나는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낮게, 거의 숨처럼.

완벽한 음정은 아니었고,

박자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인물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참아온 감정이 어디에서 올라오고,

어떤 단어에서 멈추는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라는 걸.


그래서 그 흥얼거림을 레퍼런스와 프롬프트로 바꿨다.

나는 기능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공기를 설명하고 있었다.
소리의 구조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설계하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소설의 한 장면이,

먼저 현실의 소리로 태어나는 순간이었으니까.




AI는 감정을 모른다, 그런데 장면은 살아났다


몇 초 뒤,

피아노 전주가 흘러나왔다.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자,

내가 상상했던 무대가 서서히 겹쳐졌다.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묘하게 닮아 있었다.


음 끝의 떨림,

숨을 고르는 타이밍,

감정을 밀어 올렸다가 다시 낮추는 흐름.


AI는 감정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건넸다.

프롬프트는 명령어가 아니라 번역문에 가까웠다.


나는 인물의 시간을 데이터로 바꾼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언어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다시 원고를 읽었다.
활자였던 장면이 공기를 갖기 시작했다.

인물의 눈빛이 또렷해졌고,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더 명확해졌다.


노래가 소설을 보완한 것이 아니라,
소설이 품고 있던 감정을 증폭시켜 주었다.


보이지 않던 장면이,
이제는 실제로 숨 쉬고 있었다.




자동화가 아닌, 몰입의 확장


많은 사람들이 생성형 AI를 이야기할 때 효율을 먼저 말한다.
얼마나 빠르게 만들 수 있는지, 얼마나 생산적인지.


하지만 내가 경험한 건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여러 버전의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프롬프트를 수정했다.


조금 더 절제되게.
조금 더 낮게.
조금 더 오래 견딘 사람처럼.


기술은 빠르게 결과를 내놓았지만,
나는 그 결과 위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자동화는 시간을 단축시켰지만,
몰입은 오히려 깊어졌다.


나는 그 여백 속에서 인물을 다시 설계했다.
그의 밤은 패배가 아니었다는 것.

스스로를 지운 시간이 사실은 누군가를 밀어 올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


그 순간 깨달았다.

기술은 감정을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얼마나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얕게 쓴 감정은 얕게 들리고,
깊이 들여다본 감정은 결국 닮은 결로 돌아온다.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


그 소설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 이야기를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고,
내가 만든 인물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던 그 밤을.


나는 디자이너다.
화면을 설계하고,

흐름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감정을 구조화하는 사람.

그래서 이번에는 소설을 쓰다가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들고,
느껴지지 않던 것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이미 한 번, 나는 그 장면을 살아냈다.


언젠가 이 소설이 공개된다면,
독자들은 그 장면을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혼자 조용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장면에는
이미,
노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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