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하던 직업의 이름으로 일한다는 것

교탁 밖에서, 나는 어떤 교육자가 되려 하는가

by 디자이너 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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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교사라는 직업을 지금도 선뜻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요즘은 교사들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교권이 약해졌다고, 감정노동이 심해졌다고, 버티기 어려운 직업이 되었다고.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지금의 교육 현장은 또 다른 균열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사’라는 단어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기억 때문이다.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권력을 가진 어른들을 여러 번 만났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모욕을 주고,

지도라는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하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어른들.


폭력은 꼭 주먹의 형태로만 오지 않았다.

말은 가벼웠지만, 남는 것은 오래 갔다.


물론 좋은 선생님도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더 깊게 각인된 건, 선의보다 악의의 얼굴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교탁 위에서, 농담처럼 부모를 입에 올리던 어른.

그 말을 웃으며 넘긴 학생은 모범생이 되었고,

“그 표현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학생은 그 자리에서 예의 없다는 낙인을 받았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교실에서의 정의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의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옳고 그름보다,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교실에서, 세상의 구조를 조금 일찍 배웠던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의 기억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따뜻함은 천천히 스며들지만, 폭력은 선명하게 찍힌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교사라는 직업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교육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다.


다만 나는 교탁에 서는 교사는 아니다.

정해진 교실에서 출석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으로 내 앞에 앉은 사람들과 만나는 교육자다.


내 학생들은 중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이거나 이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성인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한 명의 어른이고, 나는 그 곁에서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성적을 쥔 사람도 아니고,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들의 미래를 공식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권한도 없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것은 평가의 권력이 아니라, 관계의 책임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제 인생에서 절 믿어준 어른이 처음이었어요.”
“강사님은 제 자존감 지키미세요.”
“튜터님을 만난 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터닝포인트예요.”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잠시 숨이 멎는다.

내가 감히 뭐라고 이런 인사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거창한 걸 한 적이 없다.

그저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고, 쉽게 단정하지 않았고,

내 감정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재단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당연해야 할 태도’가 누군가에겐 낯선 경험이었다는 사실이,

이 직업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하여


얼마 전 한 커뮤니티에서 현직 교사라고 밝힌 사람이 쓴 글을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이 있어도 겉으로는 웃으며 아무 말 하지 않고,

대신 생활기록부에 불리하게 적어 복수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생은 졸업 후 중요한 순간에야 그 기록을 떼어보게 될 테니, 그게 진짜 복수라는 식의 문장이었다.

가볍게 웃는 말투로 적혀 있었지만, 그 안의 의도는 가볍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스크롤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예전의 교실에는 물리적인 폭력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더 조용하고 은밀한 방식의 권력이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기록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한 사람의 몇 년이 응축된 문장이고,

어떤 순간에는 기회의 문을 여닫는 장치가 된다.


문장은 짧지만, 그 문장이 담는 시간은 길다.


물론 나는 안다. 그 글은 일부일 것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자신의 자리를 진지하게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이 누군가를 향한 공격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오래 붙들게 된 질문은 이것이다.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사람은,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제나, 행사하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의 삶에 더 오래 남는다는 것.


운 나쁘게 그 한 사람을 만난 학생은 수백 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그 권력은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기록이 되고, 기억이 되고, 어쩌면 미래의 한 갈림길이 된다.




나는 무엇을 다르게 하고 싶은가


나는 교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교육이라는 일을 선택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겪었던 방식과는 다른 결의 교육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신뢰를 건네는 자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내 학생들은 이미 성인이다.

각자의 삶을 책임지고, 각자의 선택으로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통제할 수도, 통제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질문을 건넨다.

정답을 주기보다, 스스로 생각하도록 기다리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두고,

그 선택의 무게를 스스로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어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나는 그들의 인생을 대신 설계하지 않는다.

그럴 자격도, 이유도 없다.

다만, 그 설계가 나의 감정이나 판단 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누군가의 미래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가능성을 그날의 내 기분에 따라 줄 세우지 않는 것.


어쩌면 내가 지키려는 윤리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사람을 내 감정의 연장선 위에 올려두지 않는 태도.
그저, 내가 가진 작은 영향력을 장난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


나는 그것만은 다르게 하고 싶다.




직업의 이름보다 태도의 문제


나는 여전히 ‘교사’라는 단어 앞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그 단어에는 내가 겪어온 장면들이 겹쳐 있고,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려 한다.


문제는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어떤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력을 다루는가에 있다는 것을.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기 이전에, 영향을 남기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영향은 대개 아주 사소한 순간에 결정된다.


한 문장의 평가, 한 번의 눈빛, 한 줄의 기록.


그 짧은 순간들이 누군가의 방향을 미묘하게 틀어놓는다.


나는 교탁 위에 서 있지 않지만,

누군가의 삶에 작은 각도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하려 한다.

나의 말이, 나의 표정이, 나의 판단이 그 사람의 자존감에 불필요한 균열을 남기지 않도록.

내가 가진 영향이 누군가의 가능성을 좁히는 힘이 아니라, 조금 더 넓히는 힘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싫어했던 자리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는 일


나는 내가 싫어했던 직업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다.


만약 언젠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때, 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교육자가 한 명 있었어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다짐은 없다.

다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이 나의 감정이나 권력욕 때문에 흔들리지 않기를,

그들의 가능성이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축소되지 않기를.

그리고 아주 작게라도, 자기 자신을 믿어볼 수 있는 온기를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은 과거의 기억을 반박하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교육은 폭력이 아니어도 된다고,
권력은 복수로 쓰이지 않아도 된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더 섬세할 수 있다고.


나는 오늘도 교탁이 아닌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다른 가능성을 살아내 보려 한다.


내가 싫어했던 이름을 내 방식으로 다시 써 내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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