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첩보의 별>을 떠나보내며.
집에 돌아오면 곧장 발가락으로 컴퓨터 본체를 누르고 볼일을 보러 가던 시절이 있었다. 메이플스토리가 전부였던 소년. 그것은 나를, 또 내 또래를 장악했다. 주말이면 삼삼오오 모이던 시골소년들에겐 바깥세상도 메이플스토리였다. 전사, 마법사, 도적, 궁수. 각자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면 논두렁을 나섰다. 활을 좋아했던 나는 궁수가 되기 일쑤였다. 자연과 기계가 맞닿는 지점인 시골길에는 온갖 무기들이 넘쳤다. 막대만 남은 농기구부터, 뭉개진 철제 덩어리까지. 개 중에서도 영문도 모른 채 길가에 누워있는 기다란 나뭇가지는 만능이었다. 완드, 검 심지어 활까지. 어느 직업에나 적합했다. 그렇게 무기까지 선택하면 사냥에 나섰다. 도랑과 하우스는 흔한 몬스터들의 출몰지. 퀘스트로 우리는 땀 섞인 볏짚을 자주 공략하러 나서곤 했다. 논밭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각지고 거대한 볏짚들. 오를 수 있고, 아무리 때려도 티 안 나는 그 친구들은 여러모로 보스 몬스터에 제격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갈무리 지어질 때면 모험가들은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를 뒤로 한 채 다음 여정을 기약하곤 했다.
무수히 오르내리는 태양처럼 영원할 것 같던 그 기약은 알아차릴 틈도 없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함께할 것만 같았던 그때의 소년들과 함께. 나는 연락이 닿지 않는 모험가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해가 떨어지는 서울에 앉아있다. 그리고 내 손에 쥐여 있는 스마트폰. 거기에 깔린 네이버 웹툰엔 당시의 모험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얼마 전 연재가 끝난 <첩보의 별>이다. 주인공은 설전설, 31년 전통의 원조 CIA 스파이다. 동료들과 악의 무리를 무찌르는 게 그의 일상.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듯 하지만 설전설은 허점 투성이다.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건 부지기수. 어쩌다 주변인이 돕거나 혹은 당사자가 좌초하여 일이 마무리되면 특유의 허륜안으로 자기가 해결한 듯 자랑스러워한다. 그와 함께하는 요원들, 국장과 미나리 그리고 양하치 역시 곁에서 설전설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첩보의 별 세상에서 설전설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주인공이고 칭송을 듣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전설의 세계관은 위기에 봉착한다. 차츰 설전설의 본질을 알게 돼서일까. 동료들인 전에 병실을 조사하던 요원인데 짧게 줄여서 전병요는 은연중에 그를 무시하고, 미나리는 설전설 곁을 떠나려는 시도를 자주 한다. 어찌어찌 설전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지만 간당간당하다. 그러다 복수심을 품은 그의 적, 물망초가 설전설 동료들에게 현실을 불어넣는다. CIA가 아닌 평범한 직업을 찾고, 일상적인 연애를 시작한 것. 목적을 잃은 CIA는 그렇게 사라지고, 설전설은 갑작스러운 동료들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전설이 주인공이던 세상에서 뛰쳐나온 동료들에게 이제 그는 그저 허황된 꿈을 좇는 짐 덩어리일 뿐이다. 정신이나 차리라고 말하며 그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설전설은 친구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연이 섞인 추적 끝에 물망초를 찾는다. 온 세상에 현실을 퍼뜨리려던 물망초를 설전설은 여전히 직접 무찌를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설전설의 세계로 돌아온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그를 해치운다. 늘 그랬듯 허황 찬란한 설전설은 주인공이 되어 그의 가치관을, 그의 세상을 이어나간다.
허무맹랑한 히어로 설전설에게서 모험을 즐기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입을 맞추지 않아도 서로의 역할을 알던 그때. 눈앞에 아무리 큰 적이 마주해도 언제나 승리를 맞이했던 소년들이 있었다. 이제는 괜스레 창문을 바라보며 그땐 그랬지로 통용되는 기억으로 남을 뿐이지만. 승리의 기억은 여전히 매력적임에도 그것을 눈앞에 가져올 생각은 없다. 없다기보단 안 될 것만 같다. 어느 틈에 물망초가 나에게 현실을 불어넣었을까. 아쉬우면서도 안돼라는 생각이 앞서는 기분이 복잡다단하다. 내가 주인공이던 세상에서 한 번 빠져나왔다고 돌이킬 수 없다니.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외쳐보는 소리 없는 아우성.
얼마 전, 새로운 조카가 생겼다. 아직 만나진 못했지만, 이제는 엄마라고 불릴 누나가 고맙게도 영상을 자주 보내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이안이. 누군가는 후대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 이안이가 시작할 모험을 기대한다. 너는 얼마나 많은 악의 무리를 무찌르고 세상을 구해낼까. 그것에 성공하고 나면 삼촌에게 자랑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게. 그리고 다음을 부탁한다며 언젠가 끝이 날 그 모험의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춰주고 싶다. 자기가 주인공일 세상을 온전히 더 즐길 수 있도록.
이천십팔 년 오월 십육일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