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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02. 2019

방랑하는 불안을 품에 안으며

<말테의 수기>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당신을 읽었습니다. 그때 그것들은 내 안에서 터져 나와 나의 사막에서 나를 덮쳤지요. 그 절망에 빠진 것들이 말입니다. 당신도 결국엔 절망에 빠졌지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지도마다 잘못 표기되어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가는 길이 그리는 절망에 찬 쌍곡선은 마치 금이 가듯이 하늘을 가로질러 단 한 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 멀어졌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온 지 꼭 일주일 째다. 싱가포르까지 포함하면 벌써 10일. 관광이 지닌 포션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거리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다. 답 없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된 시간들. 그래서인지 다시 들춰본 <말테의 수기>에서도 위 문장에 사로잡힌다. 처음 북마크를 달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와 닿진 않았는데. 낯선 곳에서 동지 하나가 늘어난 듯한 기분이다.


<말테의 수기>를 언제 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트레스가 가득할 때면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평소 눈여겨봤던 책들을 쟁여오곤 하는데, 그 틈에 껴 있던 게 이 책이다. 어떤 구성인지, 무슨 내용인지를 따지기 보단 느낌대로 사기 때문에 읽다 보면 당혹스러운 순간들이 있다. 니체를 읽을 때 그러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술자리마냥 질질 끌다가 결국 검색창을 띄웠다. 작가가 신변잡기적으로 써내려 간 게 말테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잘 읽혔다. 손꼽히는 명작인데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은 탓일까. 그제야 문장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말테의 방황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안감이 내 주위를 계속 맴도는 요즈음. 진로에 대한 고민을 차치하더라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처럼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나름 신문방송학을 전공한답시고 여러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하기도 했고,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짐작해보기도 했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돈을 들이고 있었다. 이미 그에 합당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인생에서는 초보자를 위한 학급 같은 것은 없어. 세상은 우리에게 늘 다짜고짜로 가장 어려운 것을 요구하거든


그럼에도 모르겠다. 돈도 좋고, 명예도 좋고, 권력도 좋은데 그것을 차지했을 때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선다. 몇 달 전, 오랜만에 흥미로운 사람을 만났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나라 공무원 체계에서 차관 다음 정도. 인터뷰 주제는 그녀가 맡고 있는 일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중장기적인 대책에 관한 것이었다. 열변을 토하는 그녀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의식 중에 꺼내놓은 지갑이 더 인상적이었다. 여기저기 터지고, 손때가 묻은 중저가 브랜드의 지갑. 검색만 해도 나오는 그녀기에, 그녀보다 비싼 지갑을 갖고 있던 내가 왠지 부끄러웠다. 드러내 놓고 지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무례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나름 우회한답시고 인생의 목표를 물었다. 그저 자기 일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할 따름이라는 그녀. 그러면서 그녀는 정신없이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내가 그녀의 나이에 들어섰을 때 행복한 이유가 있다면, 물질 때문일까 아니면 나만의 가치관 때문일까.


다른 축에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따지면 높은 위치에 있는 그는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이야기하곤 했다. 일을 따내는 과정과 높은 사람에게도 서슴없다는 당돌함 그리고 돈. 그는 그가 속한 사회를 말하며 내가 거기에 제법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는 그녀보다 존경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성취를 거머쥐고 있지만, 그의 입 밖에서 나온 건 긍지와 한탄뿐이었다. 세상엔 사랑이란 없어. 서로 잘 되려고 하는 짓이지. 사랑을 말할 때조차 그는 의무를 강조했다. 목표를 향해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그에게 행복을 차마 물을 순 없었다. 걸림돌일 것만 같았다.


오, 말테야, 우리는 그냥 이 지상을 떠나는 거야, 사람들은 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우리가 지상을 떠난다 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별똥별이 떨어져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소원을 빌지도 않는 것과 같아. 넌 말이다. 말테야, 소원을 비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소원을 비는 것을 포기하면 안 돼. 소원이 다 성취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평생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소원도 있어. 그러다 보니 어쩌면 성취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을 수도 있지. (말테의 수기, 87p)


한창 학회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할 때, OB선배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표현했던 마르크스를 공부했고, 자본주의의 일원으로써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모순이 맞닿은 지점은 언제나 궁금증을 남긴다. 그들은 지금 사회가 갖는 문제에 대해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항변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그들은 말테의 엄마를 닮았다. 딸의 이른 죽음. 그로 인해 마음에 상흔을 지닌 채 살아가는 그녀. 크게 할퀸 상처에 그녀는 끊임없이 아파한다. 그녀는 이뤄지지 않을 소원만을 간직하다 죽는다.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그것에 기댄 채로. 선배들이 말테의 엄마처럼 늘 가슴앓이할 것 같진 않다. 다만 이뤄질 수 없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음속에 괜스레 별을 담아두기 싫었던 나는 학회를 나갔다.


보잘것없는 짤막한 첫 문장 한 마디를 쓰려다가 인생이 다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은 만날수록 고민이 깊어진다. 그들이 살아내는 삶도 정답에 얼마큼 가까운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정량화할 수 없는 그것을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내가 어떤 삶을 추구하든지 간에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수도 있고, 중대한 고민인양 세상을 고민했던 나는 잊힐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만난 교수님은 그런 나를 간파하셨는지 꿈이 뭐든지 간에 발을 담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한편, 말테는 사랑을 말한다. 말테는 신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지만, 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불타서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밝게 빛나는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이다.


말테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랑하라는 걸까. 말테가 의외로 촐랑이는 성격이라 쉽게 뱉어버렸다면 그는 이미 잊혔겠지. 늘 해왔던 고민에 무게만 뺀 채 끄적여 본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의 밤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은 모기들과 함께 무르익어 간다.

이천십팔 년 시월 칠일,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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