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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Apr 09. 2019

가벼워지기 좋은 시간, 100년

<자살클럽> 그리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한창 공포물에 매료돼 있던 시절이 있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무척 흐릿하던 시절이었고, 웹하드가 한창 인기 있던 때. 어린 나이에도 은밀한 숫자 19가 떡하니 붙은 호러물을 찾기 쉬웠다.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시험기간이 끝날 때면 으레 영화를 틀어주던 읍내 종합학원에서도, 담임이 담당이어서 회장 자리를 손쉽게 꿰찼던 교내 영화감상부에서도 공포영화는 단골이었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큐브와 쏘우, 여러 좀비물도 여기서 접했다. 그래서인지 공포물이라고 명명된 책에도 자연스레 손이 가곤 했다. 언뜻 기억나는 건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정도. 재미는 없었다. 영화에서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에 익숙해진 탓인지, 활자가 전하는 공포가 마냥 시시할 뿐이었다. 차라리 포와 그 약혼녀의 이룰 수 없었던 신파적 사랑이야기가 더 흥미로웠으니.


대신 이 책이 매력적이었던 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꽤나 이름난 단편소설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었다. 전에 읽었던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이 꽤나 인상적이었고, Axt 7, 8호에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들먹이며 단편소설을 찬양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 사이 드문드문 언급되던 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언뜻 들은 이름을 재발견했을 때 갖는 타격감은 꽤나 크다. 우리 학교 전자책 도서관을 들추다가 그의 단편을 발견했을 때 모름지기 대출 버튼을 누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00년 전 유명했던 공포소설이란 타이틀은 이제 큰 메리트를 갖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던 <노스페라투, 1922>를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보다 꺼버린 것과 비슷한 이유랄까. 공포를 느끼는 역치가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너무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스티븐슨의 단편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군데군데 박혀있는 유쾌함과 쉽게 읽히는 문체 덕택이었다.


단편선들 속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자살클럽>의 맬서스 경이다. 그는 주인공도 아니고, 일순간 사라지는 조연 중 하나다. 자살클럽에서 꽤나 오래 살아남은 그는 중풍을 겪은 후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들먹인다. 그러면서 그는 자살클럽에 갓 들어온 변장한 보헤미안 왕자와 그 수행원에게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며 한껏 늘여놓는다. 그러다 그는 수십 명이 참여한 카드게임에서 자살자로 선발되고야 만다. 홀로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과 안도와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 자살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아쉬움 없이 흩어지고, 초연했던 혹은 초연한 척 자살클럽에 발길을 내디뎠을 맬서스 경은 그렇게 소설에서 퇴장한다. 


매 순간 변하는 인간 심리를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 대목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들 말은 해도, 부닥치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며 주체할 수 없어하던 맬서스 경. 당당한 척하면서도 수없이 떨어야만 했던 찰나들이 모처럼 떠올랐다. 매일같이 감정에 솔직할 수 없기에, 그가 죽음을 선고받은 순간 느꼈을 감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복잡다단했다.


그는 이번에도 몹시 화를 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곤 온종일 시내를 배회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 후 마차를 빌려 타고 교외로 나가 또 술을 마셨다. 자신이 이처럼 즐기는 동안에 아내는 슬픔에 잠겨 있을 걸 생각하니, 또한 마음속으론 아내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술을 마시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술을 더욱 마셔댔다.
 
-:- 전자책ver. 74%, 병 속의 악마


누군가를 고통에 빠뜨리지만 않는다면 참 좋은 핑계다. <병 속의 악마>는 천일야화 풍의 교훈을 전달하는 느낌이랄까. 인간의 욕심에 대해 일깨우고자 하는 단편 느낌이다. 그저 술 더 먹을랭하는 이 문구를 가져온 이유는 그만큼 책이 읽기 쉽고 유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공포의 색채가 흐려졌다면 스티븐슨이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여운과 문체로 승부 봐야 한다는 느낌에서랄까. 마음먹고 읽을 필요도 없이 자기 전 한 챕터, 한 챕터 찬찬히 읽다 보면 금세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적당히 세상살이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책. 100년 전 수많은 사람을 공포로 물들이던 책은 활자에 실렸던 무게를 감춘 채, 무서움을 모르는 독자를 맞이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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