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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y 19. 2019

꿈을 쥔 채 막막해하는 사람들에게

<면도날> 그리고 서머싯 몸

"전 시행착오 따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도 들어가 봐야 제 목표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자네 목표는 뭔가?"

그는 잠시 망설였다.

"바로 그게 문젭니다. 아직 목표를 모르겠어요."

(전자책ver. 85p)

나는 유난히 꿈이 없었다. 직업적 소망을 꿈의 대체어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꿈도 고민도 없었던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장래희망을 말해 보라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꿈이 없었다. 대신 뭔가 대단해지고 싶었다. 그것이 뭔지도 몰라도. 겹겹이 두꺼웠던 모니터 앞. 정년 은퇴를 앞두던 선생님은 넉넉히 시간을 가져보라며 다른 친구들 차례로 넘기셨다. 그때 내가 조금 관심을 갖고 있던 여자애가 화가라고 말했다. 돌고 돌아 찾아온 내 순서. 나 역시 꿈은 화가라고 답했다. 그림을 즐겁게 그려 본 적이 없던 내 이름 옆에 실물화상기는 화가라는 글씨를 비췄다. 그녀와 일말의 공통점이라도 갖고 싶었던 마음에서였을까.


무얼 하고 싶냐는 물음은 18년은 더 맴돌았다.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일은 연례행사였고, 고등학교 땐 희망하는 과나 학교를 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대외적인' 내 꿈들도 마구잡이로 바뀌었다. 화가라는 꿈은 여자애와 싸우고부터 흐물흐물해졌다. 이후 선생님, 정치가, 법관 등이 거쳐갔다. 꽤나 오래갔던 꿈은 외교관이었다. 학창 시절을 죄다 시골에서 보낸 나는 외국 생활에 대한 선망이 있었고, 외교관이란 네임밸류도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이 주는 든든함 혹은 겉멋이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어쩌면 꿈은 많았다. 다만 진득하게 추구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뭔지 몰라도 대단해지고 싶었다.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전자책ver. 127) 


대학에 와서도 꿈이란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 중 하나였다. 머리 좀 컸다고 합리화와 정당화에 능해진 나는 꿈에 대한 정의를 바꿔버림으로써 한동안 도피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꿈은 직업이 아닌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무계획적 행복추구의 시작이었다. 마르크스를 공부했고, 고삐 풀린 듯이 해외를 오갔다. 언론을 공부하면서부터는 이름난 사람들을 닦달하며 글을 썼다. 문학에 빠졌다가 외교를 공부하고, 패션을 좋아하다가도 역사에 관해 글을 쓰기도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끝낸 건 없는데 그 새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아무것도 못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체할 듯이 직장을 구했다. 무엇이 될까에 대해 평생을 고민해 왔는데, 직장이 정해진 건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지 벌써 3개월이다.




이름 모를 파랑새를 쥔 채 산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속 시원히 제 이름을 말해준다면 뭐라도 해볼 텐데,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느닷없이 튼 둥지는 답답할 때가 있다. 한 번은 동료가 어떻게 해서 이 회사에 오게 됐냐고 물었다. 어찌어찌 얼버무린 후에 온갖 종류의 부끄러움들이 몰려왔다. 업계에 대한 무지부터 이 회사에 왜 내가 있지라는 궁금증까지. 동기들은 각고의 과정을 거쳐 꿈을 이뤘는데 난 거저먹은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틈만 나면 문을 두들기곤 한다. 이런 고민을 종종 친구들은 배부른 고민이라 한다. 수입도 괜찮고, 이름 있는 기업인 데다, 워라밸도 있는데 무얼 더 바라냐고. 그러게. 나도 답답하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전자책ver. p.178)


서머싯 몸의 <면도날> 속 래리는 자못 나와 다른 선택을 한다.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의 꿈이라면 존재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는 대학도 택하지 않은 채 뒤적이듯 책을 읽다, 파리로 훌쩍 떠난다. 근본 모를 것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탄광촌에 갔다가, 농장에서 포도를 땄다. 마땅한 직업도 구하지 않고, 여자친구도 관심 밖이다. 인생에 대한 올곧은 답을 찾는 것이 그에겐 꿈이자 행복추구였다. 그 과정 자체가 말이다. 그를 오래도록 좋아했던 이사벨이 래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자, 작중 화가이기도 한 몸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식 그 자체를 갈망하기도 해. 안다는 것 자체에서 만족을 느끼기도 하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그건 뭔가 심오한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일 수도 있고." (전자책 ver. 229-230)


래리는 그 단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인도로 떠나기도 한다. 현인들과 어울리며 존재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종래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인생을 이야기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미국을 돌아다니는 트럭 기사와 뉴욕을 누비는 택시 기사로서 말이다. 황금기로 불리던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기여코 괜찮은 수입원과 연인을 포기한 래리. 그를 오래도록 짝사랑한 이사벨은 이해하지 못한다. 래리와 파혼한 후 부유한 남편을 둬 샤넬을 입는 그녀였다. 래리는 대신 몸에게 힌트를 준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전자책 ver. p.724)




간혹 두려운 순간들이 있다. 회사에서 적당한 일을 하고, 적당한 돈을 받고. 뭐든지 적당히 하는 삶에 안주하게 돼버리고 마는. 어릴 때부터 쥐고 있던 이름 모를 파랑새가 그대로 잊히고 마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던 소년이 세상에 찌든 중년이 되더니 노년에 와서는 팔팔했던 시절을 후회만 하다 관 속에 드러눕고 만다는 흔한 레퍼토리 말이다. 그런 나를 꾸짖듯이 래리가 말한다.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야. 평생을 찾지 못한 답을 주저하지 말고 계속 찾아보라는 듯이. 지금의 나는 아무리 봐도 어리석은데, 당분간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서머싯 몸이 <달과 6펜스에서> 그렸던 망나니 스트릭샌드가 떠오른다. 그때도 작가가 막연히 던지고 도망간 희망고문에 한동안 마음앓이를 했었다. 곧 소설 속 사람들로 대리만족한 것에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현실에 돌아갔었고. 가진 거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서머싯 몸을 동경하고, 질투하면서. 그래도 <달과 6펜스>와는 다르게 작가는 소설 말미에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자기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보기 드문 인물에게서 나오는 광채를 동경할 수는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전자책 ver. p.813)고 말이다. 그 역시 현실에선 이상을 좇을 생각은 없었을까. 그 답을 소설의 서두가 이정표인양 알려준다.


날카로운 면도칼의 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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