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그리고 서머싯 몸
타이베이에서 지우펀으로 향하는 버스 안. 내달리는 차창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옆에 있는 누나의 팔을 툭툭 쳤다. 변소 한 칸만 한 집들이 형형색색으로 언덕 한 구석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던 찰나, 마이크를 쥔 가이드가 말했다. 지금 밖에 보이는 것들은 무덤이에요, 돈이 많을수록 화려하게 짓곤 하죠.
어딘가에서 뼛조각이 온전하게 남아있나 걱정하고 있을지 모를 집주인들. 그들은 자신이 누워있는 공간이 바다 건너 이방인의 눈요기가 될 거란 생각을 해봤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땅을 누볐을 자신이 그루터기 신세로 박혀있으리라 예상이나 했었을까. 막연히 그들의 인생을 헤아리려다 다시 창밖의 풍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도 한때 자신의 인생에선 주인공이었겠지.
"자네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말할 수 있겠나?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Part 1 전자책 Ver. p.584)
인생에 대한 의문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상투적인 글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고민을 제법 해왔음을 알고 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답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일다가도, 아침잠에서 깨어날 무렵의 꿈 같이 흩어지곤 한다. 한 번은 영화 <트루먼 쇼>가 사실은 나에게 이 세상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만든 힌트라는, 그런 발칙한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주인공이란 생각도 있었지만(실은 과도한 지분을 차지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 대한 답을 알고 있기에 묵묵히 그들의 삶을 살아내고 있단 지레짐작이었다.
나만 단골이라 생각하는 카페 창가 쪽에 자리 잡아, 이른바 귀납식 추론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지금의 존재들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것들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커피를 홀짝이는 순간 내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머리가 힐끔 빗겨진 할아버지를 보며 머리칼이 풍성했을 젊을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지금만치 늙으리라 상상도 못 했을, 옆집 꼬마와 치고 박았을 소년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에는 화분이 있었다. 분홍색 월계수 잎을 겹겹이 쌓은 하트 모양이었는데, 칠이 벗겨져 형편없었다. 그가 담고 있는 식물은 이파리도 없이 줄기만 덩어리째 남아 있었다. 심미안을 꺼낼 필요도 없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이 화분도 전에는 꽃피우던 식물을 담았을까. 혹은 이 화분을 만들었을 사람은 월계수 잎을 칠할 때 만족스러워했을까. 곧 이러한 상상에는 끝이 없으리란 걸 깨닫고 수많은 이야기가 담길 뻔한 귀납식 셔터를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조건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도 실패한다. 만사가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비는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내린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어느 것에도 이유나 까닭이 없다. (Part 2. 전자책 ver. p.620-621)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은 다리를 저는 필립이다. 부모님이 일찍 죽었기에 백부의 손에 자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소년이다. 전자책으로 1700장을 가뿐히 넘기는 페이지 동안 그의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간다. 학교를 다녔을 적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소년이 있었다. 필립은 성인이 된 후 그의 이름조차 잊어버리지만, 어린 시절 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요동치곤 했었다. 필립이 끔찍이도 싫어했던 패니 프라이스라는 여성도 있었다. 그녀는 누구 말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곤 했다. 자신이 미술에 대해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자신의 재능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도 얻지 못하고, 돈이 바닥나자 자살한다. 그녀의 장례식장에는 미술학원에서 그녀를 흉보던 사람들만이 참석한다.
이렇듯 필립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부분이 필립의 관점에서지만, 필립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각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 관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을 거쳐간다. 이름이 잊힌 소년처럼 좋아했지만 가닿을 수 없는 사람도 있고, 패니처럼 싫어했음에도 마지막을 함께하는 사람도 있다. 개개인은 모두 다르고, 만남의 깊이마저 제각각이다. 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만남도 필립과 패니는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비가 내릴 때면, 우산이 있는 사람도, 우산이 없는 사람도 비를 마주한다. 합격의 눈물이라 칭하는 이도 있고, 엊그제 떠난 사람의 눈물이라 칭하는 이도 있다. 방울방울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비는 비인데. 우리는 서로 다른 비를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네. 우리가 우리의 시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위대한 화가라고 부르지. 그러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해. 그러나 우리 자신은 마찬가지야. 위대하다든가 시시하다든가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니까. (Part 1. 전자책 ver. p.681)
서머싯 몸이 말하는 인생은 이렇듯 모두가 제각각이고, 제멋대로다. 존재하는 데엔 이유가 없고, 까닭을 찾는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지 그 끝은 허무할 수도 있다. <인간의 굴레에서>의 시인 크론쇼는 시시한 평가를 받는 문인이다. 생계용 글을 써 내려가면서 술과 담배를 즐긴다. 그런 그의 인생 말년에 한 비평가가 찾아온다. 그는 시궁창 인생에서 썩어가는 시인을 조명하면서 시답잖은 평을 받던 글을 예찬한다. 시인이 죽은 후, 비평가는 천재를 발굴해낸 대가로 승승장구한다. 찌들었던 시인의 삶은 다른 사람을 칭송할 때나 사용되는 고난과 역경이란 위대함으로 포장된다.
인생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아무리 크론쇼의 인생을 찬양한다고 한들, 끝나버린 그의 하루들은 요지부동일 것이고, 묘지 아래 박혀버린 그의 몸뚱이는 박수갈채에 반응할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 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Part 2 전자책 ver. p.861)
똑 빼닮은 사람은 있어도 똑 빼닮은 인생은 거의 없다. 각기 다양한 무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진열장에 놓인 무늬들을 보면 정말 갖고 싶은 것도 있고, 무심결에 지나치고 마는 것들도 있다. 화려한 직조를 거친 무늬부터 별다른 공정 없이 단조로운 무늬까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울릴까. 실은 그런 것을 깨달을 새도 없이 인생은 흘러간다. 그렇기에 서머싯 몸은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 것을 권고한다. 선택은 본인 몫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