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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2. 2019

찰스 린드버그는 왜 '네' 가정을 꾸렸을까

1920년대를 강타한 미국 대중스타의 이중생활

2003년 8월 미국과 독일의 이목을 끄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회견장에 등장한 이들은 사뭇 평범해 보이는 독일인 남녀들. 독일에서 모자를 만드는 여성을 어머니로 뒀던 그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름을 몰랐다. 1년에 세네 번씩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본명만큼은 밝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절의 정보라도 알린다면 다신 우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저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일 뿐이라며. 


성인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약소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미국에서 이름나 있었던 인물.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들은 아버지를 밝히기 위해 회견장에 나왔다. DNA 결과 아버지와 100% 일치했기에 증거도 충분했다.


그들이 주장한 아버지는 20년대 미국의 대스타이자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였다.


192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우주대스타 찰스 린스버그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미국의 우주대스타 찰스 린드버그

1902년 태어나 192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찰스 린드버그.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럽까지. 그가 도전에 성공했던 1927년의 비행기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종이 쪼가리 같은 몸체에 나침반만으로 방향을 판단해야 하는 판이었다. 날씨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고, 한 번 조종간을 잡으면 비행하는 내내 놓기 쉽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놓았다간 사고에 휘말리기 십상이었기 때문. 당시 비행사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챙기기 힘들었다. 연료는 연약한 비행기에 부담이 됨은 물론이고 직접 넣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난관을 뚫고 대서양을 가로지른 게 바로 찰스 린드버그였다.


그가 비행에 도전한 이유는 오티그 상(Orteig Prize) 때문이었다. 1926년, 뉴욕의 부호였던 레이몬드 오티그(Raymond Orteig)는 조종사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기 위해 뉴욕에서 파리까지 논스톱 비행에 성공한 자에게 25,000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찰스 린드버그 이전에 여러 팀에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열악한 비행기 탓에 사망사고가 생기기도 했다. 


1927년 5월 20일, 날씨가 다소 좋지 않았지만 린드버그는 비행길에 오른다. 비행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교신이 끊겨 사태를 절망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33시간 30분 만에 그는 파리에 착륙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착륙장에서 그를 환영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사람들은 모험을 굉장히 갈망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 리>에 열광했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모험하는 사람들에게 성공할 시에 상금을 주겠다며 돈을 걸었다. 자전거로 세계일주에 도전한 애니 런던데리의 모험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한 것들이었다. 때문에 최초로 하늘길을 개척한 린드버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티그 상과 더불어 이러한 명성을 얻은 그는 출판, 강연 등으로 그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1927년 타임지 최초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찰스 린드버그의 부인 앤 모로우
명문가 출신 앤 모로우와 결혼하다

이러한 인기 속에서 그는 대부호의 딸 앤 모로우(Anne Morrow)와 결혼한다. J.P Morgan 사의 파트너이자 미국 고위직에 몸담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찰스 린드버그의 재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개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린드버그를 멕시코 시티로 불렀을 때 둘은 처음 만났다. 명문 스미스여대 출신이자 글을 쓰던 앤은 그에게 첫눈에 반했고, 찰스 역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곧 결혼했고, 대중은 선남선녀의 결혼에 환호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유명한 사건의 피해자가 될 찰스 주니어를 낳았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Charles Lindbergh Jr.) 납치사건은 세기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묘연했던 찰스 린드버그 납치사건

1932년 3월 1일 2층 방에서 고이 잠들고 있던 부부의 아들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용의자들은 접이식 사다리를 통해 방에 침입했고, 그 아들만 납치한 채 사라진다. 당시 집에 있던 사람들, 린드버그 부부를 비롯해 집안일을 봐주던 사람들은 그 아들이 납치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방에 있었다. 납치범들은 부부에게 돈을 요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부부는 중재자를 통해 돈을 전달했지만 5월 12일 주니어는 결국 죽은 채 발견됐다. 선남선녀 커플의 아들이 납치되고, 죽었다는 뉴스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연일 스포트라이트는 부부를 주목됐고, 사람들은 어서 범인이 잡히기를 고대했다.


시간이 꽤 흐른 1934년 9월 한 남성이 10달러 치를 주유했다. 주유원은 그가 내민 지폐(정확히는 어음)에 짜증이 났다. 그 지폐는 1933년 발행을 중단한 화폐였던 것이었다. 그는 은행이 지폐를 거부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차 번호를 남겨놨다. 주유원이 은행에 돈을 들고 가자 은행원은 지폐에 주목했다. 지폐에 적혀있던 발급번호가 납치사건 때 몸값으로 사용됐던 그것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날부로 사건은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차 번호는 브루노 하우프트만(Bruno R. Hauptmann)의 소유. 그를 압수 수색하자 지갑과 차고에서 몸값에 사용됐던 지폐들이 나왔고, 그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누가 린드버그 가정이 그 집에 머무른다는 것을 범인들에게 알려줬는지, 브루노의 필체와 범인이 쓴 필체의 불일치 그리고 중재자가 목격한 범인의 용모가 브루노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여러 의혹들을 남겼다.

앤 모로우와 자녀들. 납치사건 이후 부부는 5명의 자녀를 더 뒀다
찰스 린드버그는 왜 네 가정을 꾸렸을까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찰스 린드버그가 무려 네 개의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근거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현재 그가 다가정을 가진 데에 있어 2개의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찰스 린드버그가 인종우월주의자라는 것과 납치사건에서 비롯된 감정의 변화라는 것이다.


찰스 린드버그는 인종우월주의자?

먼저 인종우월주의자로서의 찰스 린드버그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찰스 린드버그에 관한 책 <The Case that never dies>를 쓴 로이드 가드너(Lloyd Gardner)가 그 주축이다. 그는 납치사건 당시 범인들이 아이를 납치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범인들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던 찰스 린드버그가 때마침 새로 구입한 집에 머무르게 될 것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스케줄의 장본인인 찰스 린드버그만이 조종하고, 알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건 당일 찰스는 뉴욕에서 강연 일정이 있었음에도 갑자기 집에 머물렀다. 찰스는 까먹었다고 주장했지만 약속을 꽤나 잘 지켰던 그로선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따라서 일정 조종자인 찰스가 범인들에게 납치를 지시하고 사건을 꾸몄다는 것이다. 찰스와 범인들 간에 몸값 교환이 비교적 스무스하게 이뤄진 것도 그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찰스는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 로이드는 찰스 주니어가 구루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다른 이들의 그것에 비하면 약소한 편이었지만 주니어의 사진이나 영상을 살피면 정상인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종우월주의자들에게 있어 완벽하지 못한 신체를 가진 자가 집안에 있다는 건 엄청난 수치. 다만 아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고아원이나 보육원으로 자연스럽게 넘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찰스 린드버그의 인종우월주의적 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인종우월주의자 집단인 나치와 친했던 것이다. 나치가 마수를 뻗치기 전인 30년대 중후반 나치의 비행정책에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41년에는 나치와 미국이 친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전후에도 그는 독일로 건너가 그 재건을 도왔다. 특히 그가 일가견이 있는 비행분야에서 그는 일종의 컨설턴트로서 도움을 줬다. 50년대에는 좀 더 대담해졌는데, 그게 바로 그가 3개의 가정을 꾸린 이유다. 우월한 유전자를 양산하기 위해 3명의 여성에게서 자식들을 낳게 한 것. 실제 직속 가정에서는 그가 유전자 관련 잡지를 정기구독했다고도 밝혔다.


나치 깃발 아래 선 찰스 린드버그
인종우월주의설의 약점들

그러나 그가 인종우월주의자라는 주장은 많은 약점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주니어 납치사건을 들어보자. 로이드는 의심쩍은 정황이 속속들이 있는 사건 속에서 내부 인물이 찰스 린드버그라고 지목하지만 유력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 FBI 프로파일러 출신이자 이 사건의 범인을 찾고 있는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는 린드버그 부부의 고용인이었던 바이올렛 샤프(Violet Sharp)를 지목한다. 그는 그녀가 범인과 결탁하진 않았지만 사건 당일 린드버그 부부가 어디 있냐는 전화에 집에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범죄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자살했기에 명확한 사실을 알 순 없다. 그녀가 죄책감에 죽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그리고 주니어가 구루병을 앓았을 것이란 건 추측이지 명확한 의료기록이 없다고도.


두 번째는 찰스 린드버그가 간택한 여성들 중 2명이 장애인들이란 것이다. 모자를 만들며 생계를 잇던 브리짓(Brigitte)과 마리에타(Marietta)는 독일인 자매였는데, 둘 다 거동에 문제가 있었다. 인종우월주의자면서 장애인들과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족속을 만든다는 발상. 누가 봐도 모순적이기에, 우월한 유전자 양산을 위한 씨 뿌리기도 합리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찰스 린드버그가 완벽히 인종우월주의자가 아니라는 것 역시 탐탁지 않다. 그의 직속 가족들 역시 잡지까지 구독할 정도로 유전자 문제에 관심이 있던 찰스가 숨겨둔 부인(정확히 혼인을 하진 않았지만)들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찰스와 앤 린드버그의 말년
납치사건이 낳은 마음의 병?

그렇다면 찰스는 말짱한 앤 린드버그를 두고 유전적 결함이 있다고 보이는 독일인 자매 그리고 그 자신의 비서와 아이를 낳았을까.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주장은 단순 변심이다. 1932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은 부부의 금슬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부부의 막내 딸인 리브(Reeve)는 아이가 죽은 후 95%의 부부는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고, 그 자신의 부모도 그렇게 됐을 것이라 추측했다. 리브 역시 2살 배기 자식을 잃은 경험으로 첫 남편과 이혼하기도 했다. 또한 주니어가 살해당한 후로 찰스와 앤 린드버그 부부는 아이들 납치 위협을 또 받아 3년 동안 유럽으로 뜨기도 했다. 지속적인 협박에 부부관계에 금이 갔을 가능성이다.


한편으론 나이를 먹은 찰스가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다. 1957년 뮌헨. 55살의 찰스는 한 디너파티에서 31살의 브리짓과 마리에타 자매를 만난다. 이들은 그의 비서지만 신원이 정확히 알려지진 않은 발레스카(Valeska)의 친구였다. 발레스카는 찰스의 자식을 낳은 세 번째 여자. 이렇게 세 명의 여자와 찰스 린드버그는 찰스가 죽은 1974년까지 교류를 이어간다. 찰스는 일 년에 3-4 차례 독일 가정 자식들과 함께 지냈다. 앞서 소개했듯,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실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카로이 켄트(Careu Kent)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찰스는 자식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시골로 같이 놀러 가기도 했다. 브리짓은 찰스 얘기를 할 때면 웃음꽃이 절로 일어 그들의 관계가 비교적 친밀했던 것으로 그 자식들은 회상했다. 편지나 사진 교환도 활발해 브리짓에게만 150통 정도. 세 여자는 평생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찰스 린드버그는 이렇게 세 여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앤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들을 채워나간 것처럼 보인다.


찰스와 앤 린드버그의 즐거운 한때

그러나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먼저 당사자인 찰스 린드버그가 생전에 사생활에 관해 일절 침묵했다. 2003년 브리짓의 자식들이 기자회견에서 직접 밝히지만 않았더라면 찰스의 외도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앤 린드버그는 찰스가 독일에 자식을 낳았던 것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2001년까지 생존해 있었던 그녀는 자식은커녕 외도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린드버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입을 열고 있는 막내딸 리브는 어머니가 남편의 데이팅을 짐작했을 것 같지만 그녀 자신이 믿고 싶지 않아 했었으리라고 밝혔다. 그 외 마리에타와 발레스카의 가정은 린드버그가 아버지인 것만 인정할 뿐, 이외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찰스 린드버그가 네 가정을 꾸린 명확한 이유를 밝힐 수 없는 이유다.



참고,


(기사)

Bojan Pancevski (May 29, 2005). Aviator Lindbergh 'fathered children by three mistresses', The Telegraph

Penelope Green (April 17, 2008). But Enough About Them, The New York Times

NBC NEWS(Nov. 28, 2003) DNA said to confirm Lindbergh kids. http://www.nbcnews.com/id/3607054/ns/technology_and_science-science/t/dna-said-confirm-lindbergh-kids/#.Wl9X66jiZPY

Timothyna Duncan (March 1, 2017) World-famous aviator Charles Lindbergh's wife'knew something' about his multiple affairs and second families in Europe, their daughter reveals on 85th anniversary of Lindbergh baby's abduction. Dailymail


(다큐멘터리)

Larry Klein (2013). NOVA: Who Killed Lindbergh's Baby. PBS


(책)

Lloyd C. Gardner (2012) The Case That Never Dies: The Lindbergh Kidnapping. Rutgers University Press



(학술논문)

Mark W. Falzini (2006) Studying the Lindbergh Case. New Jersey State Polic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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