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그리고 하인리히 뵐
한스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넓은 현관홀에 다다르자 순간 멈칫했다. 왼쪽에 미소 짓는 천사상이 서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밤에 왔을 때 그를 반겨주던 바로 그 천사상이었다. 한스는 멈춰 섰다. 천사상은 그에게 윙크하는 것 같았고, 측면에서 그에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천사의 굳은 시선은 그를 비켜갔고, 도금한 백합을 든 손도 움직이는 자세가 아니었다. 다만 천사의 미소만이 그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살며시 미소로 화답했다. 천사상이 환하게 드러난 지금에야 천사상의 미소가 고통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p. 333, 전자책 ver.)
천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소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 알려진 천사가 그 임무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걸까. 다가오는 한스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면서도, 신에게 부여받은 의무 탓인지 억지웃음이라도 짓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중반, 천사상들은 켜켜이 묵은 먼지 속에 인자한 미소를 감추고 있었다. 빨간 깃발로 채워졌던 도시는 폐허가 된 채 회색빛이 드리웠다. 천사만이 아니라 모두의 미소를 가리고 있었다. 천사마저 도시의 기억을 숨기고 싶던 걸까.
정거장에 사람들이 차츰 모여들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언덕에서 자라난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솟아난 유령. 가는 길도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유령 같았다. 짐꾸러미마다 자루, 커다란 마분지 상자와 작은 상자를 끼고 있는 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커다란 녹색 H자가 찍혀 있는 누런 골판지가 전부인 듯했다. 그들은 소리도 없이 나타나 말없이 촘촘히 늘어서서 한 무리를 이끌었다. 전차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경적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그들은 살아 움직였다. (p.104)
하인리히 뵐의 <천사는 침묵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을 조명한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패배자로서 철저히 파괴당한 도시는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잃어버린 듯했다. 삶의 목적도, 방향도. 황량한 도시는 목적 없는 발걸음을 무던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나 가족을 잃은 슬픔이 응어리졌지만, 발자국 뒤로 흘려보내야 했다. 생존 앞에선 가슴 한편 자리마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운 시절, 작가는 사람들이 존경을 마다하지 않던 천사의 표정으로 무너진 도시를 바라본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를 신에 닿게 해 준다는 그의 얼굴로 말이다.
주인공 한스는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탈영병으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 몸이지만, 웬일인지 한 서기관이 그를 대신해 죽어줬다. 우여곡절 끝에 도시에 닿은 그가 처음 마주친 얼굴은 석조 천사상의 그것. 얼굴과 머리는 우중충한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눈의 동공에는 거뭇한 먼짓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한스는 후-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낸다. 숨겨졌던 미소가 차근히 드러나면서 한스는 희열을 느꼈지만, 이내 발견한 천사의 얼굴은 볼품없었다. 죽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흥미가 사라진 한스는 이윽고 찾는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들어간다.
나치 협조자지만 전쟁 후에도 문제없이 돈을 끌어모으던 피셔는 성모상을 마주한다. 그는 가톨릭 복음잡지를 복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회로부터 15세기에 만들어진 그것을 선물 받는다. 은은한 미소를 지닌 성모상을 바라보며 피셔는 삼위일체의 거룩함을 느끼다가도, 구역질을 느낀다. 그는 주교의 압력을 받아 종교적 이유로 나치에 입당했다. 전쟁 땐 나치에 협력했고, 전후엔 예술품 사재기로 금고를 가득 채운다. 그는 성모상을 보며 회한에 잠긴다. 괴테를 공부하며 즐거움을 느끼던 그는 돈으로 금고를 꾸리며 삶에 대한 권태와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인생에 대한 권태는 성모상에 대한 혐오로 덧칠해졌고, 그는 돈을 만지작거리며 방문을 나선다.
종교적 색채를 지닌 석상들은 소설 속 인물들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주치지만, 그 끝맛이 쓰리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전쟁을 올곧이 견뎌내야 했던 인물을 향해 미소 짓는 천사는 전쟁이 남긴 먼지를 벗어냈음에도 고통이 서려있다. 성스러운 성모상은 과거의 행복했던 자신을 떠올리게 하다가도, 현재의 역겨운 처지를 상기시킨다.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을 거듭하던 종교는 전쟁 앞에 손을 쓸 수 없었고, 천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투영했다.
이들은 소설의 끄트머리에 다시 선다. 한스는 비슷한 처지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찾은 교회에서 일전의 천사상을 마주친다. 기차의 조개탄을 적당히 훔치는 한스와 암시장을 누비는 여인의 결혼. 전쟁은 사랑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전에 비해 밝아 보이는 천사상을 한스가 자세히 살폈을 때, 그 미소엔 여전히 고통이 잔존하고 있었다. 천사의 눈은 그를 비켜 갔고, 백합을 든 손은 꼼짝없이 굳어 있었다.
한편, 피셔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던 친척의 장례식에 참여한다. 그는 친척의 자선행위를 신종 휴먼 스포츠라 깎아내렸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피셔는 그 못지않게 물욕으로 가득한 친척과 함께 진창에 깔린 천사상을 밟고 관을 채우는 흙더미를 지켜본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 천사는 두 남자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천사의 수려한 곱슬머리가 꾸르륵 소리를 내는 진흙탕 속으로 잠겨 들었고, 천사의 팔뚝도 땅속으로 점점 깊이 파고들어갔다. (p. 340)
돈으로 채운 무게에 천사상은 마냥 진흙탕에 가라앉을 뿐이었다.
전쟁은 쇠퇴를 도시에 들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침식했다. 사랑을 매개로 신과 이어주던 천사상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바라본 천사상은 끝맛이 쓰렸고, 천사들은 본연의 몫을 하지 못한 것에 한탄이라도 하듯 고통으로 침잠했다. 하인리히 뵐은 나치의 잔혹함에 가려진 전후 독일인들의 참상을 이렇게 담담하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