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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y 13. 2020

두려움이 몰고 온 감정과 민주주의

<The Monarchy of Fear> 그리고 마사 누스바움

인터넷 뉴스가 암울하게 다가오곤 한다. 기사 자체는 언론사 따라 기자 따라 언변이 달라지곤 하는 거니 심드렁하게 지나칠 수 있는데, 댓글이 관건이다. 기사나 댓글이나 여론 형성이라는 비슷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기사는 기자가 프레이밍하고, 댓글은 대중의 일원이 대의를 집결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괜스레 Best라는 조그만 글씨가 덧붙여져 있어도, 해당 댓글은 기사를 접한 대중의 의중을 대변하듯 보인다. 여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그 대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댓글이 온갖 혐오 표현과 극단적인 언어로 가득 찰 때다. 더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이거나, 진영논리로 나아가기 앞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한 주제임에도 확정이라도 난 듯 공격적인 문장을 꾸며낸다. 돌을 던지는 행위에 손을 얹는 건 클릭 한 번으로 가능하기도.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하는 게 이렇게 간단하다는 것에 그리고 그 여파를 가늠이라도 했을지 의심스러운 댓글들에 왠지 모르게 울적해졌다.


대안으로 댓글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흑백논리와 매도로 들어찬 댓글창을 읽노라면, 답답했다. 그들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판정사가 되어 자기들끼리 험한 언어로 심판을 내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왜 이리 화가 나있을까. 발전적으로, 생산적으로 논의를 이끌 수 있음에도 그 길을 거스르는 댓글들에 그냥 그것들을 읽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나라가 분열과 분열로 이어지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연이은 부정적인 논조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는 느낌이었다. 뉴스창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접했다는 느낌보단, 분노 게이지만 쌓이는 게 싫었다.


이런 상황을 꽤나 재미나게 바라볼 수 있는 책을 발견했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The Monarchy of Fear>다. 미국에서 일할 때, 슈퍼바이저(a.k.a. 상사)가 중고서점에 크레딧을 걸어 놓을 테니 읽고 싶은 책은 한껏 가져가라는 친절함에 덥석 집어온 책이다. 나름 정책 연구하러 왔으니,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그런데 그것은 내 전공이 아니었고, 책장은 모르는 작가들의 현혹스러운 제목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눈길 좀 끈다 싶은 책은 굿리즈(Goodreads)라는 도서 리뷰 사이트에서 호응도가 낮았다. 그러다 고른 책이 <The Monarchy of Fear>다. 리뷰가 꽤 많을뿐더러, 책에 대한 평가가 다소 논쟁적이라 포인트가 된 것도 있었지만, 어지러운 제목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어서 벗어나고픈 마음도 한몫했다.




책은 두려움과 그 위험성으로 시작한다.

Fear always simmers beneath the surface of moral concern, and it threatens to destabilize democracy, since democracy requires all of us to limit our narcissism and embrace reciprocity. (p. 61)


작가에 따르면 두려움은 민주주의 가치를 위협한다. 민주주의란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을 경계하고 상호보완을 기치로 하는데, 두려움은 이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이 기치는 민주주의를 여타 정치제도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점이다. 군주제가 단적으로 말해 신뢰 없이도 명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회라면, 민주주의는 시민들 간 수평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투표로 예를 들자면, 시민들이 1표씩 투표권 행사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약속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선발된 사람의 결정에 힘을 실겠다는 쌍방 신뢰를 기반으로 가능하다. 만약 여기서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투표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때, 작가는 신뢰를 위시한 민주주의 가치를 무너뜨릴 수 있는 두려움이 발현된 경우 네 가지를 소개한다. 분노(Angry), 질투(Envy), 역겨움(Disgust), 여성혐오(Misogyny)가 그것이다. 두려움을 좀먹고 성장한 이 친구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타인에게 돌 던지는 일을 일삼는 댓글들의 몸통인 격이다.


이 네 가지는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역할에 충실하다. 분노를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여집합에 대한 비하표현이 올곧게 잘 발달한 편이다. 다른 세대, 성별, 지역에 대한 비속어가 거리낌 없이 쓰인다. 무슨 일이 발생할 때면, 무엇보다도 혐의자의 인구통계적 변인들을 파악하고 이를 일반화하려는 경향성이 짙다. 잘 다듬어진 욕지거리로 권위주의 사회에서나 볼 법한 폭력과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한다. 사건에 대한 진중한 고민의 부재는 물론, 타 집단을 향해 벽을 올리는 데에 급급하다. 이처럼 단면만 보고 판단하게 만드는 분노란 감정은 건강한 협치의 과정을 가로막고, 서로를 까내리는 데에 불을 지핀다. 어느새 불신이 만연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노는 어디서 태생하는 걸까. 마사 누스바움은 사회에 해가 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분노가 싹 틔운다고 말한다. 일례로, 경기가 침체되는 데엔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직접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고, 금리나 통화 등 비교적 간접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이 한 데 모여 크고 작은 인플레이션이나 스태그네이션 따위를 유발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들이 겹치고 겹쳐 원인을 찾기도, 해결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시간 좀 써서 고민하노라면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이때, 큰 고민 말고 얘 잘못이야! 하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 불황에 지친 대중의 시선은 한 곳으로 쏠린다. 자신이 원인이 아니란 점에 안도한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킨 대상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한 마디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일에 대해 분노의 대상을 특정함으로써 물음표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진보적 성향인 저자는 이와 같은 두려움이 인종,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 등에 대한 비난으로 직결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심각해졌다. 9.11 테러 당시 부시 대통령의 발언과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비교해보자. 부시는 9.11 테러에도 무슬림을 오해할만한 발언을 삼갔고, 그러한 프레이밍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반면, 트럼프는 이란과의 갈등, 시리아 내전 등 이슈가 벌어질 때 무슬림이 호전적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했다. 덕분에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늘고, 이들 집단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따라서, 미국은 어느 때보다 양분화됐고, 이민자 규제에 힘 보태는 추세가 눈에 띈다. 다양한 인종을 품음으로써 성장하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미국이 이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이라 감정은 우리 사회에 분노를 비롯해 질투, 역겨움, 여성혐오 등을 데려와 구성원 사이에 불화를 지핀다. 이것들을 눈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 마사 누스바움은 여러 가지를 제안하지만, 세 가지를 소개하겠다.


첫 번째는 Transition Anger다. 우리말로 분노 이행 정도 되려나. 마틴 루터 킹은 그의 전설적인 연설 'I Have a Dream'에서 흑인들을 착취한 백인들에게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st 복수론이 얻을 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동안 흑인들에게 가해졌던 착취에 대한 보상으로 백인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일은 어려운 일일뿐더러, 또 다른 반발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가해자들마저도 품겠다는 마인드로 접근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나은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뉘앙스다.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안고 가겠다는 자세를 말한다.


Utopianism is a forerunner of despair, so faith and hope need to find beauty in the near. (p. 215)


마틴 루터 킹의 연설에 덧붙여 하나를 더 말하자면, 크나큰 목표를 세우지 말자는 것이다. 킹은 연설에서 피부색을 떠나 아이들이 어우러진 사회를 꿈꾼다고 말했다. 그는 거창한 세상이 아닌 그저 아이들이 서로 차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유토피아처럼 완벽한 세상을 통해 우리가 차별을 완전히 제거하고, 으쌰으쌰 지낼 수만 있다면 물론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은 근절하기 어렵고, 차별철폐라는 이상만을 꿈꾸다 보면 그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따라서, 포부를 갖기보단 은은하게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길을 작가는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끼리 자주 서로 접촉하는 것이다. 요즘은 그룹별로 잘 나뉘어 마주치기 힘든 세상이다. 다른 경제적 입장에 서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반대의 정치적 입장에 선 사람과 의견을 나누기 어렵다. 오히려 끼리끼리 모여 그룹이 가진 틀에 자신들을 가두고 일관된 방향으로만 사유한다. 이는 타인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돈 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부의 복지정책을 이해하기 어렵고, 돈 좀 없다는 사람은 기업의 손을 들어준 정부를 이해하기 어렵다. 서로 만날 기회가 있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을 한다면 이해의 역치가 낮아질 텐데, 그럴 기회가 없다. 따라서, 저자는 사람들이 얼굴 마주칠 기회가 늘어야 두려움이 불러들일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세미나나 강연이 좋은 예시다.




부쩍 인터넷에 늘어난 혐오표현들을 보면서 예전의 선플달기운동이라도 다시 정부 차원에서 진행해야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다. 우리가 왜 상처를 주는 표현들을 표현의 자유라 정당화하며 거리낌 없이 쓰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몇 사람을 집단이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면에선 엇비슷해 보이는 데 말이다. 이런 상황을 <The Monarchy of Fear>가 직접적으로 설명하진 않아도, 간접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지점을 남겼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You will cease to fear, if you cease to hope (By Seneca, p. 204)


작가의 말처럼, 인간이라면 두려움을 느끼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더 좋은 걸 바란다는 희망을 품은 이상,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안고 가야 할 두려움을 경계하고,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잘 활용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다. When you fear, there too you will hope라 작가가 선언하듯, 두려움에 필수불가결하게 따라오는 희망을 조명해 우리 사회에 발전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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