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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3. 2019

버팔로 빌 쇼의 주인공, 명사수 애니 오클리

낯선 그녀들의 역사 #5. 미국 서부 쇼버라이어티 전설로 남은 사격천재

1875년* 오하이오 주 서커스에서 명사수로 활동하고 있던 프랭크 버틀러(Frank Butler). 그에게 제안이 하나 들어온다. 시골 소녀와 사격대결을 하면 돈을 준다는 것. 상대방이 애송이인데다가 소녀라는 점이 탐탁지 않았으나 돈이라면 오케이였다. 그렇게 둘은 100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대결을 펼친다. 목표물은 새. 프랭크의 첫발이 명중했다. 곧이어 소녀의 탄알도 명중. 그렇게 둘의 백발백중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다 프랭크가 25번째 슈팅에서 목표물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는 기여코 타겟을 놓치지 않았고, 승리를 가져갔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을 풍미한 여자 사격수 애니 오클리(Annie Oakley)의 라이플 실력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명사수 애니 오클리. 그녀의 사격술은 미국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집안에 등장한 천재 사격수

퀘어커 교도인 49세의 제이콥 모지(Jacob Mosey)는 열여덟 꽃청춘 수잔 와이즈(Susan Wise)와 1848년 결혼에 골인한다. 9명의 자녀 중 7명이 살아남았는데 애니는 그 중 5번째였다. 애니가 태어나기 48년 전인 1812전쟁에서 부상을 당했던 제이콥은 몸이 썩 성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1865년, 출타했던 제이콥은 집으로 오는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났다. 돌풍을 뚫고 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그는 앓아 누웠고, 곧 사망했다. 애니의 가족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로 애니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며 농장에서, 또는 하녀로 일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875년 재혼한 엄마와 같이 살게 됐지만 새아버지 역시 곧 세상을 떠나 애니가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했다.


애니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약간이나마 놀 시간은 있었다. 이 때 애니가 선택한 장난감은 라이플. 당시 여자들이 총을 만지는 것을 좋게 여기진 않았기에 엄마가 말렸지만 자유로웠던 서부였기에 강제성은 없었다. 이에 그녀는 독학하여 사격술을 익히고, 토끼나 다람쥐를 잡으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노획한 것들을 팔면서 얻은 수익은 덤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사격술은 지역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사격에 소질을 보였던 애니 오클리
명사수 애니 오클리, 쇼에 등장하다!

1875년 오하이오에 서커스 공연단이 찾아 왔다. 그 중에는 24살의 명사수 프랭크 버틀러도 끼어 있었고, 앞서 언급했던 사격대결을 펼쳤다. 프랭크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고, 애니의 사격술에 감탄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서커스 표를 주며 놀러오라고 초청했다. 애니는 거절하지 않았고 둘의 만남이 시작됐다. 출중한 사격술에 반했던 버틀러는 애니에게 청혼을 했고, 애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제 극빈했던 집을 벗어나 남편의 서커스 생활을 따라다니게 됐다. 


서커스에서 프랭크는 파트너에게 초를 들게 하고, 총으로 불을 끄는 묘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느 날 프랭크의 파트너가 병에 걸려서 일을 그만두었고, 애니가 그의 파트너로서 양초를 받아들었다. 어느 날 프랭크가 컨디션 난조로 단발에 촛불을 끄지 못했다. 곧 이은 총알도 불꽃을 비껴나갔다. 관중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주춤했던 프랭크는 곧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초를 집어들었다. 승부에서 자신을 이긴 경험이 있었던 애니가 총을 들어 촛불을 끄게 할 속셈이었다. 그의 의중은 통했다. 애니는 첫 탄에 불꽃을 잠재웠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환호했다. 앞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 세계를 풍미할 명사수 애니 오클리*가 탄생한 것이었다.

"거울은 총 쏠때나 사용하는 거 아닌가요?"
서커스 단원 같지 않았던 단원의 승승장구

프랭크는 자신의 자리를 애니에게 양보했다. 대신 자신이 조수가 되어 애니의 묘기를 돕기로 했다. 애니는 촛불을 끄는 것부터 남편이 던진 볼을 격추시키는 등의 묘기를 선보였다. 그들의 인지도는 점점 올랐다. 한 가지 특이사항은 서커스 치고 애니의 의상이 꽁꽁 싸매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커스에 등장했던 여성들은 남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곤 했는데, 애니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저급하게 보였다. 고로 애니는 여타 단원들과는 다르게 온몸을 가린 어린아이 같은 복장으로 쇼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아이같은 애니의 복장에 오히려 환호를 보냈다.


서커스 생활을 이어가긴 했지만 프랭크와 애니의 생활은 불안정했다. 서커스는 시즌제였기에 시즌이 한 번 끝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던 것. 그들은 사격솜씨를 뽐낼 다른 루트를 찾아나섰고, 버팔로 빌(Buffalo Bill)에 사격묘기로 입사신청을 했다. 버팔로 빌은 19세기 후반 최고의 서부 쇼였다. 버팔로 빌* 코디("Buffalo Bill" Cody)가 단장이자 메인이었던 이 쇼는 악당 인디언들을 무찌르는 서부극의 일종이면서 서커스 묘기도 적절히 섞여 있었다. 코디는 자신에게 이미 명사수 역할을 하는 단원이 있었기에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런데 이듬해 그 단원이 일을 그만 뒀고, 결국 애니가 고용됐다.

1894년 에디슨의 초기 영상촬영 실험에 참여했던 애니 오클리. 
다채로운 사격술을 전국에서 인정받다

천운이 따라줬는지 19세기 후반 대표 쇼버라이어티 버팔로 빌에 입성하게 된 애니 오클리. 그녀의 사격 묘기는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일전에 선보였던 조수가 초를 들고, 단발로 촛불을 끄는 것과 거울을 이용한 사격은 약과였다. 이제는 조수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동전을 끼워넣으면 정확히 맞추었다. 또 한 발 쏘고 총을 바꾸고, 한 발 쏘고 총을 바꾸는 등 이 총 저총으로 쏘아대기도 했다. 메인은 글래스 볼을 적중시키는 거였다. 단순해 보이는 이 묘기는 사실 여러 기술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진 고난이도 기술이었다. 조수가 던진 글래스 볼을 맞추고, 자기가 던진 글래스 볼도 맞춘다. 조수가 던지는 글래스 볼은 점점 빨라지는데 결국엔 6개를 한 번에 던진다. 애니는 그걸 또 다 쏴 맞추었다. 왼손으로 총을 들어 맞추고, 오른손으로 총을 들어 맞추기도 했다. 이 때 빗나가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애니에 대한 찬사는 끊이질 않았다. 신문사들은 공연후기로 애니를 앞장 서서 칭찬했으며, 포스터에 등장하는 애니의 이름도 점점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공연의 황금시간대인 오프닝 다음 순서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애니 오클리가 메인으로 등장한 19세기 말 미국 대표 쇼버라이어티 버팔로 빌의 포스터
라이벌의 등장 그리고 유럽으로 진출

하지만 주인공에게 라이벌이 없다면 섭섭한 법. 1886년 버팔로 빌에 또 다른 명사수 소녀인 릴리안 스미스(Lillian Smith)가 등장한다. 15세였던 그녀는 마의 7세부터 사격을 시작했으며 10세 때부터 경쟁전에 참여했다.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던 릴리안은 곧 버팔로 빌에서 애니와 피 튀기는 경쟁을 시작한다. 애니와 릴리안의 프로그램은 비슷하게 구성됐으며 애니의 별칭은 '챔피언 여자명사수', 릴리안은 '라이플 샷의 소녀 챔피언'이었다. 경쟁관계의 둘은 정반대의 개성을 지녔었다. 당돌하면서도 저돌적인 릴리안은 사나운 구석이 있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애니보다 뛰어난 발사실력을 가졌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고, 때때로 애니를 깎아내리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애니는 여렸다. 의상부터 꽁꽁 싸매고, 작은 키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 그녀는 릴리안의 험악한 인터뷰도 무시했다.


그러던 중 버팔로 빌은 미국에서의 흥행에 힘입어 유럽투어를 시작한다. 첫 공연의 영예를 안은 도시는 런던. 단원들을 가득 실은 배에는 애니는 물론 릴리안도 있었다. 얼 코트 경기장(Arena at the Earl's Court)에서 오프닝을 맞이한 버팔로 빌에서 인기스타는 당연 애니였다. 런던의 언론들은 소녀지만 사격에 있어서는 남성을 능가하는 애니를 집중조명했다. 이렇게 시작된 버팔로 빌은 런더너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아일랜드 출신의 유명한 동화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여러 왕족들 등 명망있는 사람들도 앞다퉈 구경에 나섰다. 빅토리아 여왕과 애니 오클리 그리고 릴리안 스미스의 삼자대면이 성사될 정도. 


애니의 인기는 쇼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버팔로 빌만이 아니라 영국에서 개최된 여러 사격대회에도 참여했는데 여기서도 활약을 펼쳤다. 런던 사격 클럽(London Gun Club)에 초청받아 선보인 사격은 회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기념메달까지 받게 된다. 또 윔블던 사격대회에도 참가했는데 첫 날 죽쒔던 릴리안에 비해 둘째날에 참여한 애니는 녹슬지 않은 실력으로 동생의 기를 압살해버렸다.

애니 오클리의 라이벌 릴리안 스미스(Lilian Smith)  (출처: Buffalo Bill Historical Center)
세계에서도 탐냈던 그녀의 사격술

애니의 뛰어난 실력과 사람들의 호응은 비단 릴리안 스미스에게만 질투를 유발한 것이 아니었다. 버팔로 빌의 단장인 '버팔로 빌' 코디 역시 이름있는 사수였지만 애니에 비해 조명을 못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독 돋보이는 애니 오클리와 버팔로 빌 사이에는 급기야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결국 애니는 런던 공연 도중 중도하차를 하고, 미대륙으로 돌아간다. 직접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단원들 간의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 돌아온 애니는 다른 쇼버라이어티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버팔로 빌처럼 명망있는 쇼는 없었기에 애니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사격묘기를 선보이게 된다. 이러한 방랑 생활에 지쳐가던 중 버팔로 빌로부터 파리 공연에 함께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런던에서 버팔로 빌은 여전히 인기를 끌었지만 흥행수표 애니의 부재가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 그리고 애니에게 추가적인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파리 공연부터는 질투쟁이 릴리안 스미스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니는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고, 파리 공연에 참여한다. 


파리지앵들 역시 여려 보이는 애니가 로빈훗스러운 사격술을 선보이자 격찬했고, 애니는 쇼의 성공적인 흥행을 견인했다. 프랑스에서 공연에 감동을 먹은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Sadi Carnot)과 세네갈의 왕(Dain Salifour)*은 애니를 그들의 군대로 초빙하려 했다. 특히 세네갈의 왕은 애니를 본국으로 데려가 주민들을 괴롭히는 호랑이들을 잡을 속셈이었다. 하지만 애니는 정중히 이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여튼 프랑스의 공연으로 인해 애니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사격계의 전설이자 서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에 힘입어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1894년 에디슨의 영상촬영기 실험에 참여하여 최초의 영화들로 꼽히는 영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기분이 나쁠 땐 총을 들고 이 자세를 따라해보세요!'
오해에서 비롯한 추락 그리고 은퇴

미국으로 돌아온 버팔로 빌. 애니는 버팔로 빌의 미국 투어에 참여하고는 1902년 버팔로 빌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01년 10월 29일에 버팔로 빌의 단원들이 탔던 기차가 충돌사고에 휘말렸던 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로 버팔로 빌의 공연에서 활약했던 대부분의 말들이 죽거나 사살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애니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연극 '서부소녀(Western Girl)'로 공연을 시작한다. 내용은 버팔로 빌에서 했던 것과 별 다를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애니는 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연극배우 애니 오클리가 코카인을 사기 위해 흑인의 바지를 훔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연극배우 애니 오클리는 'Any Oakley'로 명사수 애니 오클리 'Annie Oakley'와는 미세한 스펠링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름난 명사수 애니 오클리가 코카인과 도둑질을 행했다는 보도를 냈다. 여렸던 애니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에 대중들은 경악했고, 애니의 이미지는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격노한 애니는 언론들에 정정보도를 낼 것을 요구했다. 또 명예훼손을 이유로 55개의 신문사를 고발했다. 그리고 1개를 제외한 54개의 재판에서 승소한다.


재판까지 갔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애니는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러 더 많은 사격대회에 참여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던 것. 1900년대 초반 애니는 이미 40이 넘는 나이였지만 녹슬지 않은 실력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그리고 1911~1913년에는 마지막 서부극에 참여한 후 1913 시즌이 끝나자 은퇴한다.

말년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애니 오클리. 
명사수의 마지막 

은퇴 후 애니와 그녀의 남편 프랭크는 노스 캐롤라이나에 정착한다. 53세가 된 애니는 이미 백발이 성성했다. 그곳에서 애니는 휴양을 온 부유한 여인들에게 사격을 가르치며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시대를 풍미했던 명사수였기에 애니의 사격 수업은 인기를 끌었고, 700명이 넘는 여성들이 등록했다고 한다. 이 수업은 엄격한 자세로 발사를 하기에 여성스러운 몸매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또 혼자 집에 남을 때 자기보호를 위함도 있었다.


그러다 1922년 애니와 프랭크는 차사고를 당한다. 1901년 있었던 기차사고와는 다르게 애니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는 철제 틀에 의지해야 했다. 다시는 걷지 못할 정도였지만 사격만은 계속했던 애니는 1924년까지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여태껏 받았던 메달들을 녹여 사회에 환원하는 공수래공수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25년 애니의 건강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결국 1926년 결국 잠을 자는 와중에 편안히 사망했다. 애니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던 남편 프랭크 역시 18일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걷지 못하는 상황에도 총을 놓지 않았던 진정한 명사수

1926년 애니가 죽자 여러 언론사에서 명사수의 죽음을 슬퍼했다. 수년이 지나도록 버팔로 빌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애니의 스토리는 빠지지않고 등장했다. 그리고 애니는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부활했다. 애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1935년에 개봉하고, 1940년대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재탄생하게 된 것.* 또한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1950년 대에는 브로드웨이에 등장하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도 총을 놓치 않았던 애니는 결국 죽어서까지 총과 함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자리잡았다.


각주, *= 애니 오클리의 자서전과 American Experience 다큐멘터리에서는 애니와 프랭크가 1875년 사격술대결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였으나, Shirl Kasper가 쓴 애니의 전기에는 프랭크 버틀러가 한 인터뷰에서 1881년에 애니와 사격술 대결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 애니 오클리는 스테이지 네임. 실제 이름은 피비 애니 모지(Phoebe Annie Mosey)다. *= 코디의 스테이지 네임인 버팔로 빌은 남북전쟁 때 생겼다. 전쟁 당시 철도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에게 버팔로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코디는 4000마리가 넘는 버팔로를 사냥했다고 한다. 다른 헌터와 버팔로라는 별명을 내기로 버팔로 사냥 게임을 벌인 적도 있었는데 코디가 68마리, 상대방이 48마리를 잡아 코디가 스테이지 네임을 획득했다. *= 세네갈 왕 Dain Salifour에 대한 다른 정보는 찾을 수가 없어서 신빙성에 약간 의심이 간다. 이 정보는 애니 오클리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것이다. *= 하지만 영화의 등장은 버팔로 빌과 같은 쇼버라이어티가 설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 애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유투브 검색으로 찾아볼 수 있다.

참고,


(기사)

Annie Oakley injured in NC train disaster(The News&Observer, January 9, 2014)


(논문)

Annie Oakley, Gender, and Guns: The "Champion Rifle Shot" and Gender Performance, 1860-1926, Sarah Russel Cansler(Pursuit: The Journal of Undergraduate Research at the University of Tennessee, 2014)

Annie Oakley and the Disruption of Victorian Expectations, Lisa Bernd(Alabama Review Vol.65 Issue 3, 2012)


(다큐멘터리)

American Experience: Annie Oakley, Riva Freifeld (PBS, 2006)

The Real West: Wild Wild Women, Hosted by Kenny Rogers (A&E Cable Television,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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