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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4. 2019

코드네임 신시아, 제2차 세계대전을 홀리다

낯선 그녀들의 역사 #6. 대전을 뒤흔들었던 스파이 에이미 "베티" 소프

1942년 11월 8일 미국 워싱턴, 짙은 녹색의 눈동자와 적갈색 머리를 자랑하는 여인이 뉴욕행 기차에 막 탑승하려던 참이었다. 제복을 잘 차려입은 군인 한 명이 신문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신문의 헤드라인은 '연합군, 북아프리카를 휩쓸다!'. 그녀는 곧 그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정체는 그녀의 상관이었던 엘러리 헌팅턴(Ellery Huntington Jr.). 그는  경례를 하고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린 지금 전세를 뒤집었어. 연합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북아프리카를 차지했지. 저항이 없던 이유는 군사기밀이지만 자네만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에게 넘겨준 자네의 정보가 전쟁의 판도를 뒤바꿨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위해 활동했던 스파이, 코드네임 신시아. 
자유로웠던 어린 시절 그리고 예기치 못한 결혼

이 여인의 이름은 베티 소프(Betty Thorpe). 애명이 베티이고 원래 이름은 에이미 엘리자베스 소프(Amy Elizabeth Thorpe)다. 1910년 그녀는 미국 미네소타 주 해군에서 일했던 조지 소프(George C. Thorpe)와 코라 소프(Cora W. Thorpe)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해군으로 일했던 아버지 덕에 베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았다. 1차 세계대전 동안은 쿠바에서 머물렀으며 후에는 워싱턴, 하와이를 거쳐 매사추세츠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다. 깊이있는 친구를 사귀기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꽤나 즐거운 어린 시절이었다. 공원에서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고, 열렬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교관들 소풍에 따라가기도 했다. 


에이미는 보수적인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었다. 14살이 되던 해, 그녀의 다이어리 기록을 살펴보자.

그는 누구나 알만한 집안의 남자였고 21살이었지. 그와 사랑에 빠지는 나의 모습을 종종 상상하곤 했었는데... 내 나이대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침대에 갈 일은 없을거야. 우리는 서로 외로웠고, 그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단지 2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어린 나이의 경험은 다소 방종스러운 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원치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1929년, 사교계에 나선 베티는 워싱턴 엘리트들이 모이는 클럽에 자주 모습을 비쳤는데, 이때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것이다. 당시는 혼전임신에 관대하지 못했던 사회. 베티는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상대방은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비서관 아서 팩(Arthur Pack)으로 베티보다 2배 많은 40살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었던 아서는 건강은 물론 겉멋만 들어있어 그리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는 베티를 사랑했지만, 베티에게 결혼은 갑작스러운 임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이 결혼은 1930년에 이뤄졌고, 베티는 토니(Tony)를 낳았다. 그는 10년 넘게 집안에서 조용히 길러진다. 

베티의 결혼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헀다
지루함에 택한 선택지, 스파이

1931년 아서는 스페인으로 발령 받는다. 아서는 일벌레였고, 베티의 애정과 성욕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결혼생활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었던 베티는 그녀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바로 스페인 내전 속에서 영국 비밀정보국을 돕는 일이었다. 그녀는 감옥에 갇힌 천주교 목사나 조종사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생사가 걸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에는 친 프랑코계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영국 외교노선은 스페인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 때문에 외교계 인물의 편파적 행동은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고, 이를 감안해서 팩 부부를 폴란드로 전근시킨다. 


폴란드 외교계에 등장한 베티는 다시금 주목을 받는다. 그녀의 미모와 매끈한 몸매 그리고 다양한 외국생활에서 비롯한 외국어 실력은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 틈을 이용해 베티는 스페인에서와 같이 비밀정보국을 도울만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바르샤바의 외교부에서 일하는 청년들을 한껏 유혹한 베티는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처음 그녀가 얻은 정보는 히틀러의 심복으로부터 훔친 유럽정복 계획이 담긴 나치의 지도였다. 이 지도는 신문에 발행되어 알려질 수도 있었으나 영국 수상 체임벌린은 이 정보를 무시했다.


그럼에도 베티는 스파이 역할을 지속했다. 한창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솟아날 무렵인 1937년, 베티는 폴란드 외교부의 부관을 유혹했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기밀실로 들어갔고 베티는 독한 위스키를 청했다. 술에 취한 부관은 베티와 사랑을 나눈 후 곧바로 잠이 들었다. 이 틈을 타 베티는 독일군 암호 에니그마의 비밀이 숨어있는 금고를 열고, 감춰둔 마이크로사진기를 꺼내 암호키를 촬영했다. 이 정보는 영국 정보부가 쉽사리 풀 수 없었던 에니그마의 비밀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보협력국 국장 윌리엄 스티븐슨은 베티의 능력에 주목했다.
담당자 눈에 띈 코드네임 "신시아"

미국과 콜라보레이션에도 풀 수 없었던 암호를 한 여인 덕에 해결할 수 있게 되자, 영국 안보협력국(BSC)의 국장이자 뉴욕 스파이 담당자인 윌리엄 스티븐슨(William Stephenson)은 베티의 정보력에 주목한다. 당시 수상이던 처칠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스티븐슨은 베티에게 스파이 훈련을 시키기로 한다. 이 덕에 베티는 어쌔신 능력을 부여받지만 그녀에겐 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남자의 사랑이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애국자들이라도 침대에만 가면 비밀들을 마구 뱉어버리죠. 사랑에 빠지면 마음 속에 감춰뒀던 비밀들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간다랄까요.


한편 아서 팩은 칠레로 발령받고, 베티 역시 그를 따라간다. 스티븐슨은 베티에게 뉴욕으로 와서 스파이 업무를 도와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일벌레보다 스파이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곧 그녀는 남편에게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기고, 스파이들의 집합소, 뉴욕으로 건너간다.


스티븐슨은 유능한 스파이가 돌아오자 환호했고, 곧 그녀에게 달처럼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뜻에서 신시아(Cynthia)라는 암호를 부여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뒤바꿀 여성스파이,코드네임 신시아가 탄생한 것이다. 1941년 당시 미국은 여성스파이를 꺼려했다.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에드가 후버(Edgar Hoover)는 특히 여성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때문에 영국 안보협력국(BSC) 소속인 스티븐슨(William Stephenson)은 베티가 OSS에 입성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베티에게 첫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이탈리아 해군의 암호를 알아내는 것. 코드네임 신시아의 첫 프로 데뷔작이었다.


이탈리아 해군 장교 알베르토 라이스. 신시아와 하룻밤을 보낸 그는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성공적으로 첫 임무를 완수하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녀가 유혹해야 할 이탈리아 해군 장교 알베르토 라이스(Aleberto Lais)는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베티가 사교계에 주력했던 10대 시절, 알베르토는 그녀가 쓴 단편소설에 대한 피드백을 준 적이 있었는데, 알베르토는 이 때 베티를 사모하고 있었다.* 수 년 만에 칵테일 파티에서 재회한 이들. 베티는 사실상 남편이 없는 상태였고, 알베르토는 작은 키에 처자식도 있는 사나이로 장교라는 직업에서 큰 매력을 못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옛사랑의 유혹에 그는 다시금 사랑에 빠졌고, 매일 같이 꽃과 옷 등 환심을 사기 위해 물량공세를 펼쳤다.


그러다 베티는 도박을 시도한다. 알베르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암호를 알려달라고 부탁한 것. 알베르토는 배신자가 되기 두려워 거절했다. 하지만 베티는 그가 직업적 충성도가 떨어지는 점을 이용해 파시즘을 버리고 미국 해군과 친구가 되자는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그는 암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은 대신 암호를 알고 있는 서기의 이름을 알려줬다. 베티는 이 서기를 뇌물로 매수하고 이탈리아 해군의 암호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해군은 마타판 해협 전투(Battle of Cape Matapan)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탈리아는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던 알베르토 라이스를 본국으로 송환한다. 신시아와 기밀과 하룻밤을 맞교환한 알베르토는 그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코드네임 신시아, OSS에서 첫 임무를 시작하다!
코드네임 신시아 그리고 목숨과 맞바꾼 작전

이탈리아 해군 암호를 빼내는 것 외에도 베티는 하원의원의 표심을 바꾸게 하는 등 여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덕분에 그녀는 스티븐슨이 관여하고 있는 미국의 OSS에서도 임무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 곳에서 베티는 그녀의 커리어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거대한 작전에 참여한다. 그것은 바로 비시 정부의 해군 암호를 빼돌리는 것. 당시 히틀러의 꼭두각시 정부로 전락한 프랑스의 비시정부는 중립국을 표방한 미국의 워싱턴에 대사관을 두고 있었다. 이 대사관에 히틀러의 북아프리카 전쟁에 대한 계획이 담긴 암호가 매일같이 들어왔는데, 미국과 영국은 이 암호를 중간에 가로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암호를 풀 수 없었다. 베티가 나설 차례인 것이다.


베티에겐 세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대사, 고문 그리고 보좌관 중에 한 명을 골라 유혹하는 것. 베티는 보좌관을 선택했다. 그의 이름은 찰스 브루스(Charles E. Brousse). 운빨 좋은 베티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베티는 이 작전을 위해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찰스에게 다가갔다. 짙은 초록색 눈과 유창한 프랑스어의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오자 유부남이었던 찰스는 영락없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찰스는 그녀와 매일 밀회를 즐기며 해독된 암호를 제공했다. 이는 곧 백악관으로 전해졌다. 프랑스어에 유창했던 대통령 프랭크 루스벨트(Frank Roosevelt)는 프랑스어로 해독된 이것을 직접 읽었다고 한다. 


1942년 봄, 독일의 선전포고에 따라 미국 역시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다. 미국과 영국은 곧 북아프리카를 빼앗을 공략을 모색했고, 비시 정부의 해군암호를 알아내는데 박차를 가하기로 한다. OSS는 베티에게 신속히 비시정부의 해군암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했고, 베티는 고민도 없이 응했다. 이를 위해선 금고실에 암호가 담겨있는 2개의 두꺼운 책들을 빼돌려서 장마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고생과 위험을 감수해야했지만 말이다.  

부인 케이티와 함께한 찰스. 그는 스파이 베티에게 금세 빠져들었다.
스파이도 운, 행운의 연속

신시아는 알베르토에게 썼던 전법처럼 찰스에게 해군암호를 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찰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나라에 대한 배신은 물론이거니와 찰스 자신에겐 금고를 열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이에 베티는 망설일 것도 없이 비시정부 대사관의 암호책임자 장 데 라 그랑빌(Jean de La Grandvile)에게 달려간다. 역시 신시아는 그에게 당당히 돈을 줄테니 암호책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되려 베티는 그랑빌로부터 아름다운 여성은 그런 일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질책을 들었다. 이튿날 그랑빌은 베티를 다시 찾아온다.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있던 그녀에게 외교관 부인이라는 실제 신상정보를 들고 온 것이다. 그랑빌은 해명을 요구했다. 당황한 베티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정체가 들통난 베티는 어찌할 줄 몰랐다. 비시정부관의 암호책임자는 그녀의 신상을 알고 있고, 여차하면 대사관에 그녀에 대해 알릴 참이었다. 스파이는 민감한 사안이라 자칫하면 외교적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기에 베티는 찰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고백했다. 베티가 문제가 되면 찰스 역시 위험했던 것이다. 베티가 다른 남자에게 접근했다는 질투와 현 상황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지만 찰스는 대책을 찾아야했다. 그는 그랑빌이 손을 쓰기 전에 대사에게 연락했다. 대사가 전에 했던 불법적인 행위들을 그랑빌이 알고 있으며, 이를 퍼뜨리려 한다는 거짓정보를 미리 알려준 것. 그 직후 그랑빌은 비시정부 대사관에 아름다운 미국 스파이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친히 방문했다. 하지만 이미 그랑빌에 대한 불신으로 차있었던 대사는 오히려 그를 암호책임자 자리에서 쫓아낸다. 베티에게 또 다시 행운이 작용한 것이다.     


한편 찰스는 베티의 요구를 응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베티와 찰스는 코드네임 헌터(Agent Hunter)와 계획에 대해 상의한다. 그들의 계획은 브루스와 베티가 대사관에서 불륜 연기(실제로도 그러했지만)를 하는 것. 불륜을 위해 비시정부 대사관의 공간을 빌리고자 한다면 수위도 어느 정도 수긍할 것이라는 작전이었다. 탁월한 금고따기 실력으로 감옥까지 간 전력이 있지만 이로인해 요원으로 발탁되기도 했던 조지아 크래커(Georgia Cracker)가 합세했다.


첫 번째 작전, 그리고 실패

그렇게 1942년 7월 19일, 코드네임 신시아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작전이 펼쳐졌다. 조금의 실수에도 찰스의 목숨은 물론, 프랑스와 미국이 전면전을 초래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에 베티가 몸소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수위와 셰퍼드 경찰견이 지키고 있는 비시정부 대사관에 들어섰다. 예민한 개는 밤중에 하도 짖어대서 신문에 나올 정도였다. 찰스는 수위에게 아내 몰래 불륜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수위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이 커플은 오늘밤을 기념하자며 수위와 개에게 수면제를 탄 음식을 대접했고, 곧 이 문지기들은 잠에 빠져들었다. 상황이 해결되자 금고따기의 고수 조지아 크래커가 그들과 합세했다. 자정이 되기 전이었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신시아와 찰스는 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조지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왠일인지 조지아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겨우 금고를 딸 수 있었지만 암호책을 일일히 촬영할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이들은 원하는 암호키를 획득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두 번째 계획된 날은 이틀 후인 7월 21일. 하지만 OSS가 조지아 크래커를 여기저기 써먹어야 했기에 이 날에는 베티가 직접 열어야 했다. 조지아는 그녀를 위해 금고의 암호가 적힌 메모를 남겼다. 이번에 또 수면제를 사용한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기에 더 조심스러워야 했다. 이틀 전과 같이 비시정부 대사관에 들어선 커플은 음식을 나누며 친해졌던 수위와 살갑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베티가 기를 쓰고 조지아의 메모대로 암호를 입력해봤지만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결국 커플은 또 다시 작전상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코드네임 신시아, 비시정부 대사관에 숨어있는 암호키를 획득하라!
어렵사리 풀어낸 실마리

연거푸 실패를 거듭하자 상관은 베티를 뉴욕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정차된 차에 타자 백시트에는 조지아와 금고 하나가 놓여있었다. 영민한 OSS에서 베티를 위해 비시정부의 금고를 복제한 것이다. 조지아는 1:1 교습으로 베티에게 어떻게 대사관의 금고를 쉽게 딸 수 있는 지 가르쳤다. 그러나 이 과외는 쓸모없게 됐으니, OSS가 조지아를 더블폴트를 기록한 이 커플에 다시 합류하도록 지시했으니 말이다. 다음 거사는 7월 23일이었다.


7월 23일 밤이 찾아오자 커플은 또 다시 비시정부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수위는 이 불륜 커플을 아무 제지 없이 들여보냈다. 베티와 찰스는 금고가 들어 있는 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베티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갑자기 걸치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찰스는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그 순간 수위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들어온 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베티가 찰스 곁에 서 있을 뿐이었다. 수위는 곧 그들에게 사과를 한 후 물러났다. 베티의 동물적 감각이 삼수생이 될 뻔한 위기에서 그들을 구해낸 것이었다.


대충 상황이 해결되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지아 크래커가 방에 진입했다. 베티는 작전 상 계속 벗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 조지아는 별 탈 없이 금고를 열어제꼈고, 암호키가 담긴 두꺼운 책을 창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OSS요원에게 넘겼다. 이 요원은 페이지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촬영했고, 다시 창문 안으로 넘겼다. 드디어 작전 성공이었다. 베티는 오늘의 성공을 예감했는지 립스틱을 칠하지 않았고, 암호책에 승리의 키스마크를 자유롭게 남겼다. 하지만 냉정한 조지아 크래커는 그녀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도 가르쳤었고, 성실한 학생 베티는 이에 따랐다.

말년의 베티. 그녀의 전적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코드네임 신시아의 말년과 비밀

베티가 우여곡절 끝에 획득한 암호키는 2차 세계대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이젠하워의 군대는 북아프리카에 깜짝 공격을 선사하여 손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 이어 그들은 카사블랑카, 알제 등을 3일만에 수복할 수 있었다. 이 결정적인 승리 덕에 대륙의 히틀러 역시 무너졌고, 늘어질 수 있었던 2차 세계대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베티는 스파이였기에 그녀의 업적에 보상을 받을 수도, 그것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마음 속에 간직해야할 명예만이 남아있었다.


비시정부에서 암호를 빼돌린 이후 베티는 스파이 생활에서 손을 뗐다. 대신 그녀는 비시정부 보좌관 찰스 브루스와의 사랑을 선택했다. 암호를 빼돌리기 위해 불륜커플을 연기했던 이들이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이다. 찰스는 원래 부인이었던 케이티와, 베티는 원래 남편이던 아서와 정식적으로 이혼을 하고 웨딩마치를 올린다. 이들은 찰스 브루스의 멋진 고성이 위치해 있는 프랑스의 페르페냥(Perpignan)으로 넘어가 남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1963년 베티는 후두암으로,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찰스 브루스가 그녀의 연인이 있는 곳으로 따랐다.


여기까지가 스파이 베티로서 알려진 사실들이다. 헌데 베티 소프의 업적은 이것이 다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FBI가 보관하고 있는 베티 관련 문서는 65페이지에 달하는데 현재 공개된 것은 단지 5% 뿐. 그렇기에 베티가 북아프리카 전선에 기여한 것보다 더한 업적이 숨어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베티가 살아있을 적에 알려진 건 극히 소수였기에 그녀의 일생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들은 알려지기도 전에 땅에 묻혔다. 스파이는 죽어서도 비밀스러웠다. 

"저는 애국자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이에요"

베티가 후두암으로 죽기 전, 전기작가 몽고메리 하이드가 그녀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이 때 몽고메리가 베티에게 스파이가 되면서 몸을 함부로 사용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그저 제 임무를 다했을 뿐이에요. 제가 여자로서 정보를 캐내는데 깨끗한 수단을 사용한 건 분명 아니에요 하지만 전쟁이잖아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되죠. 저는 제가 애국자로서 할일을 다했다고 봐요.


각주, *= 애니그마의 해독에 기여한 사람 중에는 앨런 튜링도 있다. 그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알려져있다. *= 도서 <베일에 가려진 스파이 이야기>에선 베티가 아서 팩과 함께 스페인에서 거주할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가 종종 발견돼 베티가 10대 때 알베르토를 만났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본다. 


참고,


(인터넷)

Spartacus Educational, Elizabeth Pack(Cynthia)

Agent Cynthia: America's Mata Hari, Jonathan J. Miller


(기사)

The Brilliant MI6 Spy Who Perfected the Art of the 'Honey Trap', Hadley Meares(Atlas Obscura, Septermber 08, 2016)

(논문) 

The Spy Who Proved the Adage About Love and War, Stephen Budiansky(World War 2. Vol. 22 Issue 8 p.29, 2007)


(도서) 

Cast No Shadow: The Life of the American Spy Who Changed the Course of World War 2, Mary Lovell(Pantheon, 1992)

미녀 스파이 24인의 미스터리, 장궈리, 우양신(집사재, 2009)

베일에 가려진 스파이 이야기, 송옌(시그마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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