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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고 Mar 06. 2019

바람과 함께 사라진 그녀, 마가렛 미첼

낯선 그녀들의 역사 #7. 단 한권의 베스트셀러만을 남긴 작가

19세기 중후반, 남북전쟁이 휩쓸고 간 미국 남부도시 애틀랜타. 패배의 기운이 서린 도시 속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슬픔이 안고 있다. 그중에서도 스칼렛 오하라는 전쟁으로 집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을 잃었다. 곧이어 사고로 자식마저 잃은 스칼렛. 이제 막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남편 렛 버틀러마저 스칼렛 곁을 떠난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질 법도 하지만 스칼렛은 좌절하지 않는다. 그녀를 낳고 키워준 땅 타라(Tara)가 아직 건재하기에. 그녀는 책 말미에 외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세계적으로 흥행한 베스트셀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렇게 1096페이지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역사상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의외로 노예폐지 반대에 열을 올리던 보수적인 남부 지방 여인의 손에서 탄생했으니, 바로 마가렛 미첼이다. 

역사상 최고의 데뷔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남긴 마가렛 미첼
보수적인 지방의 진보적인 가정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은 1900년 변호사인 유진 미첼(Eugene Mitchell)과 여성참정권론자인 메이벨(Mary Isabel "Maybelle" Stephens)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에 아버지를 따라 변호사가 될 오빠 스테판(Alexander Stephens Mitchell)이 마가렛의 유일한 형제다.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Atlanta) 토박이였던 이들 가정에서 아버지는 미국 남부역사에 정통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날 당시 각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였었는지 기억해낼 정도였다. 애틀랜타의 역사 동호회 장을 맡을 정도였다. 반면, 어머니 메이벨은 보수적인 남부 분위기 속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동네 아낙네들 모임에서 여성 참정권을 강력히 주장했던 게 그녀였다. 마가렛은 이 부모님의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역사에 조예가 있으면서도 자유분방했다. 일요일 오후면 친척들과 마을 어르신들에게 불러 다니며 남북전쟁 이야기를 반강제적으로 듣기도 했다.  

남성적인 스타일이 두드러졌던 마가렛의 어린 시절
자유분방하고도 독립적이었던 어린 시절

3살 무렵, 치마를 입은 꼬마 마가렛은 불꽃이 핀 난로 곁에서 놀고 있었다. 불은 곧 마가렛의 치마로 옮겨붙었다. 빠른 진화 덕에 마가렛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마가렛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그녀는 치마를 입지 않았다(어린 시절만). 같은 사고가 반복될까 두려웠던 가족들은 마가렛에게 치마보다 바지를 입혔고, 그녀는 곧 남자애들과 어울리곤 했다. 마가렛보다 지미로 불리길 원했으며, 동네 친구들과 노닐며 야구를 즐겼다. 말을 타면서 함부로 놀았기에 옷을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동화를 썼던 그녀는 차차 장르를 넓혀 멜로드라마를 쓰고, 고등학교에서는 연극반 각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남부였기에 자유분방한 톰보이 스타일의 마가렛은 여고에서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어머니 메이벨은 마가렛이 글을 쓰는 것을 지지했지만, 그녀의 직업으로 삼는 것에는 반대였다. 여권론자였던 그녀는 마가렛이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 사회에서 진보적이면서도 존경받는 여성이 되길 원했다. 때문에 단순한 글쟁이가 아니라 당당히 대학에 들어서서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계몽적이었던 메이벨은 이런 식으로 마가렛에게 사랑을 주기보단 독립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그렇기에 공부를 싫어했던 마가렛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 최고의 여자대학이던 매사추세츠 주의 스미스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마가렛 미첼
두 죽음

마가렛이 스미스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가 미국에도 스며든다. 참전을 위해 군인들은 남부 애틀랜타 근처에 집결하여 훈련을 시작했다. 그중에는 뉴욕에서 온 부유하고 명민한, 훈훈함까지 갖췄던 청년 헨리 클리포드(Henry Cliford)도 있었다. 조교였던 그는 파티에서 4살 연하였던 마가렛을 만난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신분상, 데이트는 시한부적이었고, 헨리는 마가렛에게 청혼을 한 채 기약 없는 출정을 나선다. 청혼을 받아들인 마가렛은 마냥 기다릴 순 없었기에 스미스대학에 입학한다.


어머니의 입김에 어쩔 수 없이 다녔던 학교. 마가렛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약혼남 헨리 클리포드가 프랑스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어찌할 바 몰랐던 마가렛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다.* 헨리의 죽음으로 황폐해졌던 마가렛의 신입생 시절도 끝나갈 즈음, 또 다른 악재가 찾아온다. 인생관에 강력한 지분을 차지했던 어머니 메이벨이 인플루엔자에 걸렸는데,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 마가렛은 급히 애틀랜타행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그녀가 도착하기 전날 어머니는 숨을 거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가렛은 공부 욕구를 상실했다. 그날부로 스미스대학을 자퇴하고, 애틀랜타에 남아 아버지의 일을 돕기로 한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공부를 하라는 오빠 스테판의 조언은 적절히 묵살했다.*

애틀란타에서 밀당을 즐기다

애틀랜타에 남은 마가렛 미첼. 그녀는 사교계에 진출한다. 사교계에서 마련한 자선기금 파티에 참석한 마가렛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유행하던 옷과 춤사위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곳은 할리우드가 아닌 보수적인 남부 애틀랜타. 마가렛이 끌어당긴 건 금전이 아닌 사람들의 암묵적인 비난이었고 그녀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사교계에서도 쫓겨난다. 하지만 이까짓 일로 기죽을 마가렛이 아니었다. 진취적인 스타일에 매력을 느낀 남부 남성들도 적잖았다. 말을 즐겨 탔던 마가렛이 실수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입원하자 청년들이 나서서 문안을 온 것이다. 


이들 중에는 레드 업쇼(Berrien "Red" Upshaw)와 존 마쉬(John Marsh)도 있었다. 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들은 마가렛에게 동시에 반했다. 레드와 존의 성향은 정반대였다. 레드가 히피적인 스타일이라면, 존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남자였다. 이 정반대의 남자들 속에서 자유로운 연애 분위기를 즐겼던 마가렛은 레드와 데이트를 하고 나서 존과 밥을 먹는 등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가렛의 최종선택은 레드였다.


마가렛 미첼과 그녀의 남편 베리언 "레드" 업쇼 (출처: Margaret Mitchell House)
나쁜 남자 업쇼와 저널리스트로서의 발걸음

집안 사람들은 레드의 허랑방탕한 모습을 익히 들었기에 결혼에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닮아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하길 바라던 마가렛은 고집을 부려 레드와 결혼한다. 비록 경쟁에서 밀려났지만 존은 친한 친구였던 레드와 마가렛을 축복했고, 결혼 후에도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드와 마가렛 사이에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계획 없이 살았던 레드였기에 결혼자금이 없었던 건 당연지사. 하는 수 없이 친정집에 얹혀살게 된 사위에게 잘나가는 변호사 마가렛의 아버지는 일자리를 얻어다 준다. 돈을 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버는 데에는 과락을 면치 못했던 레드는 그것마저 그만두었으며, 2개월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등 각종 기행으로 마가렛을 애타게 하였다.


이에 마가렛은 직접 돈을 벌기로 작정한다. 홍보계에 종사했던 존에게 부탁하여 지역 신문지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보수적인 남부였기에 마가렛의 취직은 집안 남자들의 반대로 이어졌다. '돈은 남자가, 집안일은 여자가'라는 상식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던 것. 그러나 마가렛의 고집은 역시나 꺾을 수 없었고, 그녀는 아틀란타 저널 일요 매거진(Atlanta Journal Sunday Magazine)에서 주급을 받으며 일을 시작한다. 한편 레드는 부인이 취직하자 굉장한 수치심을 느낀다. 물론 그 자신은 돈 벌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돈도 안 벌면서 돈을 버는 것에 반대하는 레드의 이상주의적 발상에 마가렛은 진절머리가 났으며, 결국 이들은 이혼하게 된다.


조지아 기술대학(Georgia Tec. University) 학생들을 인터뷰하고 있는 마가렛 미첼
발목 합병증으로 저널 일을 접다

1922년부터 1926년까지. 마가렛 미첼은 기자로서 왕성히 활동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널 편집자의 의구심을 샀으나, 마가렛 특유의 당돌함과 필체는 이것이 허구임을 증명했다. 필명은 페기(Peggy). 피처기사*, 북리뷰, 패션, 성별문제 등 고른 주제에 관여했던 마가렛은 주 신문사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올 정도로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마가렛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미국 남부에서 최초로 주 신문사에서 일할 여성이 될 수 있었지만, 현 직장이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거절한다. 한편, 사생활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레드와 이혼하고 나서 여전히 친한 친구였던 존과 연인으로 발전했고 곧 결혼한 것이다. 너그러웠던 그는 마가렛이 어떤 일을 하든지 응원해주는 남성이었다.


열성적인 기자였지만 1926년 마가렛의 발목에 이상이 생긴다. 말에서 종종 떨어져 고생시켰던 마가렛의 발목에 합병증이 찾아온 것. 결국, 그녀는 방방곡곡 돌아다녀야 했던 기자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나돌아다녀야 하는 시기에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자 마가렛은 답답했다. 안타까움을 느낀 존은 책 쓰는 것을 권유했다. 이에 마가렛은 타이핑을 시작한다. 역사상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고초를 겪은 스칼렛이 타라로 돌아오는 것은 마가렛에겐 예견된 일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다

발목 합병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마가렛 미첼. 그녀의 글쓰기 방법은 독특했다. 결말 파트를 먼저 작성한 후 초장을 쓰는 것. 마가렛은 기자생활을 하면서 늘 첫 부분을 쓰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먼저 결론을 마무리 짓고, 이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는 게 편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글 쓰는 순서를 바꾸니 저널 편집자에게 칭찬을 받기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렇게 탄생했다. 스칼렛 오하라가 온갖 시련을 겪고 타라로 돌아오는 장면은 백지상태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결말로 시작을 맞이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완성되기까지 9년의 세월이 걸렸다. 헌신적인 남편 존 마쉬는 마가렛이 글을 쓰는 것을 계속 북돋워 주었고, 그 자신도 글 쓰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첨삭을 도왔다. 마가렛이 책으로 출판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가 유일한 독자였다. 손님이 오면 행여 볼까봐 수건으로 급히 가리던 게 마가렛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핑된 1,000여 장의 원고들. 이것들은 책이 되기까지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벽장, 책상 등 집안 곳곳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1935년 호기가 찾아왔다. 맥밀란 출판사(Macmilan Publishing Company)의 편집자 해롤드 래섬(Harold Latham)이 신진 글쟁이를 찾기 위해 애틀랜타를 찾아온 것. 도시 여기저기 쏘다니던 해롤드는 마가렛이라는 전직 기자 출신이 글을 완성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원고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마가렛이 아니었다. 그의 제안은 단숨에 거절당했다. 그러나 고집 센 사람은 은근히 멘탈이 약한 법, 해롤드 래섬과 함께한 자리에서 마가렛의 친구는 그녀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해롤드에게 "마가렛은 책을 쓸만큼 진지한 사람은 아니에요"하며 스리슬쩍 마가렛을 깎아내렸던 것. 자존심이 상한 마가렛은 당장 흩어져 있는 원고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롤드의 호텔에 단번에 가져가 검토를 요청했다. 원고의 양이 너무 많아 해롤드는 졸지에 짐가방을 하나 더 사야 했다. 얄팍한 마가렛 친구 덕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해롤드는 뉴욕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원고를 읽어보기 시작했고, 충분한 재미를 느꼈다. 순간의 폭발로 원고를 공개한 게 후회스러웠던 마가렛은 다음 날 원고를 돌려달라는 전보를 보냈으나 원고에서 금전운을 발견한 해롤드는 묵살한 채 회사 직원들과 회의에 돌입했다.


3개월 후, 맥밀란 출판사에서 500달러 선급과 10% 로열티로 계약을 제시했다. 책으로 돈 벌 생각은 없었던 마가렛이었기에 계약요청은 땡큐였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요청한 대로 원고들을 수정한다. 펜시(Pensy)였던 주인공 이름이 스칼렛으로 바뀌었다. 또 내일은 다른 날, 또 다른 날, 마일스스톤(이정표) 등 여러 후보군들 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이 선정되었다. 이것은 마가렛이 좋아하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각고의 과정을 거쳐 1936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총 1,037페이지, 판매가 3달러에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의 데이트폭력은 렛의 데이트폭력으로 비쳐졌다
마가렛의 삶을 두고 논할 수 없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성공가도를 이야기하기 전에, 마가렛의 삶이 반영된 요소요소들을 빼놓을 수 없다. 마가렛은 인터뷰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주인공들은 전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녀 인생사가 곳곳에 묻어난 건 사실이었다. 먼저 마가렛이 6살 되던 해, 그녀는 어머니 메이벨에게 공부하기 싫다며 떼를 부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마가렛을 말에 태우고 애틀랜타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보여주고 싶어했던 모습은 다름 아닌 곳곳에 널린 다 쓰러져가는 저택들이었다. 과거에 성대한 파티가 열렸을 법한 건물들은 이제 그로테스키한 분위기만을 연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를 극복해내기 위해선 남녀 상관없이 공부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스칼렛이 파티를 즐기던 장소들이 전쟁 후엔 폐허로 변해버리는 장면으로 부활한다. 또 마가렛의 옴므파탈 레드 업쇼도 곳곳에 등장한다. 먼저 그와 주인공 렛 버틀러(Rhett Butler)의 이름에는 정말 미묘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레드가 마가렛을 떠나기 전 레드는 마가렛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이는 렛이 스칼렛을 범하려다 실패하자 성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의 모체가 된다.


그녀는 완벽한 고증을 위해 남아도는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기도 했다. 마가렛이 책을 쓸 때 즈음 그녀의 오빠 스테판이 역사 동호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의 도움으로 남북전쟁 관련 자료를 쉽사리 모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훗날 대장이 된다. 마가렛은 1860-78년까지의 뉴스파일을 수집했다. 그리고 책 속에 묘사되는 의복에도 지적을 피하고자 수백 개의 당시 매거진을 뒤졌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그들의 어린 시절을 회자하던 당시를 기를 쓰고 끄집어내기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펼쳐 보이는 마가렛 미첼
희대의 베스트셀러 그리고 퓰리처상

이렇게 탄생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5,000권이나 팔릴까 예상했던 마가렛은 뜻밖에 초판 10,000부, 2판 25,000부가 완판되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루 만에 50,000부가 빠져나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2년 후에는 16개 국어로 번역되어 어느덧 50만 부 고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때 데이비드 셀즈닉(David O. Selznick)이 5만 달러를 내세우며 그 유명한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과 비비안 리(Vivien Leigh)를 필두로 할 영화제의를 해왔다. 마가렛은 출판욕도 없었는데 영화를 만들자고 하니 탐탁지 않았지만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화 팬들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1937년엔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또 박차고 나왔던 스미스대학에서 명예 졸업장과 메달을 받는다. 거절해왔던 인터뷰도 응하기 시작했다. 인터뷰의 화두는 단연 차기작이었다. 사람들은 마가렛의 화려한 데뷔작에 열광하면서도 그녀가 다음에는 어떤 책으로 놀라게 할지 연일 기대만발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대성공은 마가렛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남편인 존은 마가렛이 천부적인 재능을 여지없이 발휘해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다. 또 팬레터에 답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타자기 앞에 앉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는 극한직업이었다. 우울증과 내적혼란은 끊임없이 일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십자 요원으로 변신한 마가렛
차기작보단 다채로운 사회활동을 택하다

이처럼 책 한 권으로 셀럽으로 자리매김한 마가렛은 두 번째 책을 내기보단 사회활동을 지속해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십자 요원으로 변신하여 적십자 함선에 직접 승선했다.*** 전쟁기금마련을 위해 모금운동에 나서기도. 병원 가운 및 붕대를 직접 만들었다. 또 그녀의 글쓰기 실력을 발휘하여 군인들을 위한 손편지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애틀랜타 함정(USS Atlanta CL-104)의 새컨드 네임으로 그녀의 이름이 선정되었다.


1941년부터는 위험한 우정이 싹텄다. 명성이 자자했던 마가렛에게 후원을 부탁하는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발송인은 벤자민 메이(Benjamin Mays), 애틀랜타 흑인인권운동 선두주자였다. 그는 남부에서 흑인의사 양성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남부 토박이지만 진보적인 여성, 마가렛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틀랜타는 여전히 가혹한 지방이었기에, 마가렛이 그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는 순간, 인기는 물론 죽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가렛은 숙고했다. 스미스대학 시절 흑인여성과 수업 듣는 것을 거부했던 전력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들과 친해졌다. 마가렛에겐 20년 단골 세탁소의 주인이자 친구인 흑인 여성 캐리 홀브룩(Carrie Holbrook)이 있었다. 1946년 캐리는 말기 암을 선고받았는데, 남부에선 흑인들을 위한 병동을 찾기 힘들어 마가렛이 거든 적이 있었다. 덕분에 캐리는 다른 흑인들에 비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고 마가렛은 인종차별에 대해 감정이 격해졌다. 또한, 영화에 출연했던 흑인들이 상영회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분개했던 것도 마가렛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부닥친 몇 안 되는 비판 중에 노예제를 미화시켰다는 설이 있어 흑인들에게 미움을 샀었고, 이에 그녀 자신도 사죄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결국 마가렛은 벤자민과 흑인의료인재양성에 지원을 하기로 한다.


위험한 거래는 성사됐다. 마가렛은 처음 2,000달러를 벤자민에게 위탁했다. 안전을 위해 무명으로 기부했고, 벤자민과는 마주치지도 않았다. 이 기금은 흑인들이 다니는 모어하우스대학(Morehouse College)에 의학과 치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전달됐다. 이 장학금을 받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성적보단 인성으로 심사를 받아 획득할 수 있었고, 의사가 된 후에는 남부에 남아 흑인들의 의료지원에 힘써야 했다. 이 위험한 관계는 마가렛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지만 마가렛과 벤자민은 평생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다. 그리고 2002년 마가렛의 조카가 150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사후에도 인연은 지속되었다.

1949년 마가렛은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마가렛이 한창 사회활동에 열을 가하고 있었던 1949년, 그녀는 남편 존과 영화 <켄터베리 이야기>를 관람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길을 건너려던 찰나, 자가용 한 대가 위태롭게 그들을 덮치려 했다. 재빨리 존은 앞쪽으로 피했고, 마가렛은 뒤쪽으로 피했는데 이 선택이 생사를 갈랐다. 차량은 뒤로 피한 마가렛을 정면으로 들이받았고, 마가렛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즉시 병원으로 후송된 마가렛은 중얼거리며, 의사의 질문에 간단한 신호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사고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두개골부터 척추까지 파손되었고, 골반도 깨졌기에 회복은 어려웠다. 


마가렛이 죽자 범인은 자수했다. 29살의 휴 그래빗(Hugh D. Gracvitt)은 택시기사였지만 무면허였고, 사고 당시 음주에 과속에 미숙한 운전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즉시 체포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마가렛을 되돌릴 순 없었다. 역사상 최고의 데뷔작을 선보였던 마가렛 미첼은 그녀의 차기작을 선보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마지막으로 남편 존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고본을 대부분 불태워 그녀가 평소 바라던 바를 이뤄주었다. 하지만 마가렛을 영원히 추억하고 싶어 하는 팬들의 비판을 피할 순 없었다.


각주, *= 그러나 마가렛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희생당한 헨리 클리포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마가렛은 헨리의 묘석을 찾아 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 스미스대학 재학시절과 관련하여 마가렛 미첼의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마가렛의 수업에 흑인 여성이 있자 마가렛은 수업 듣기를 거부하고 나갔다는 것. 진보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마가렛 역시 남부여성이었기에 흑인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가렛은 시간이 지나 이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흑인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남몰래 마련하는 남부여성으로 변모한다. *= 사건의 객관적인 전달보다는 주관적인 면, 뒷이야기 중심으로 써내려간 기사.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할 경우, 그 사건 자체의 양상보다는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법한 피해자의 특징적인 부분을 두드러지게 기사를 쓰는 방식이다. *= 개인적으로 마가렛 미첼은 여러 면에서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Harper Lee)를 연상시킨다. 하퍼는 명작 <앵무새 죽이기>를 쓰기 전에 주인공의 뒷이야기 격인 <파수꾼>을 완성하였다. 또 죽기 직전 <파수꾼>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데뷔작이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작품을 내놓은 여성작가였을 것이다. *= 작은 도시 애틀랜타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대작이 탄생하자 지역주민들의 호응과 관심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영화화가 결정되고 나서 주인공인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가 영화촬영을 위해 애틀랜타로 건너오자 카퍼레이드를 벌여 그들을 환영함과 동시에 마가렛을 치켜세웠다. *= 그녀가 직접 치료를 했는 지 여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스미스 대학에서 의사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의료지식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별다른 활약상이 없는 걸 보면 단순 사기진작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참고,


(인터넷)

American Masters- Biography of Margaret Mitchell (2012) 

링크 http://www.pbs.org/wnet/americanmasters/margaret-mitchell-american-rebel-biography-of-margaret-mitchell/2043/


(기사)

Interview with Margaret Mitchell, Mrs. Medora Perkerson (1936, The Atlanta Journal Sunday Magazine) 

Obituary- Miss Mitchell, 49, Dead of Injuries, Special to The New York Times (1949, The New York Times)


(논문)

Margaret Mitchell: The Rebellious Southern Belle Who Created Scarlett and Rhett, Susan Brenna (2000, Biography, Vol. 4 Issue 10)

Novelist Margaret Mitchell's Role as Reporter: A Case Study, Rabia Noor (2012, International Journal of Scientific and Research Publications)

Reaching Across the Color Line: Margaret Mitchell and Benjamin Mays, an Uncommon Friendship, Nix, J. & Bohan, C. H.(2013, Social Education)

(영화)

A Burning Passion: The Margaret Mitchell Story, Larry Pierce (1994, NBC Television Film)
 

(다큐멘터리)

American Masters- Margaret Mitchell: American Rebel, Pamela Roberts (2012, 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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