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그녀들의 역사 #8. 70년대 대표 밴드 카펜터스 메인 보컬
1970년대 빌보드의 대세는 락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기류로 대세가 된 락은 퀸(Queen), 앨리스 쿠퍼(Alice Cooper), 딥 퍼플(Deep Purple)과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을 탄생시켰다. 한편으론 디스코 음악이 태동할 준비를 하여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휩쓸 예정이었다. 이렇게 저돌적인 빌보드 차트 속에서 오롯이 목소리 하나만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렌 카펜터(Karen Carpenter). 우리에게 카펜터스(Carpenters)로 알려진 밴드의 메인보컬이다. 그녀가 화려한 고음이나 기교를 가졌던 건 아니다. 대신 러브송에 최적화된 감미로운 음색을 지녔고, 이 목소리 하나만으로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빌보드의 뮤즈로 떠올랐다.
음악 하는 오빠 곁, 평범했던 아이
카렌 카펜터는 1950년 프린팅 회사에 다니는 해롤드 카펜터(Harold Carpenter)와 아그네스(Agnes)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꾸렸던 이들 부부는 카렌 외에도 카펜터스의 핵심 멤버가 될 아들 리처드를 두었다. 오빠인 리처드는 4살 위였다. 이들 가족은 특히 음악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노래를 흥얼거렸고, 아버지는 음악 덕후로서 당시 유행하던 음악들을 섭렵했다. 이런 분위기 덕에 리처드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또 재능도 있었다. 그가 3살일 때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악을 곧잘 기억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면 유머러스했던 카렌은 음악과는 거리가 있던 꼬마였다. 오히려 거리에서 친구들과 캐치볼 하는 것을 즐길 정도로 야구에 관심을 가졌다. 리처드와 카렌은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동네 학교를 다녔고, 음악에 소질을 보였던 리처드는 피아노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63년, 가족은 로스앤젤레스의 교외지역인 다우니(Downey)로 이사한다. 아버지의 이전 직장 보스가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던 찰나, 아들의 음악공부를 위해 더 큰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계산에서였다. 덕분에 리처드는 고등학생임에도 콘서트에서 연주자 자리를 제안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반면에 카렌은 부모님의 바람과는 어긋나게도 음악에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여기저기 휩쓸리던 중 카렌은 친구가 드럼 치는 모습이 멋져 보여 그날부로 막대기로 드럼 치는 연습을 했다. 부모님은 여자아이가 드럼을 치는 것에 반대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카렌은 드러머로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
첫 밴드, 첫 레이블 그리고 실패
카렌도 악기를 다룰 수 있게 되자 리처드는 그동안 상상만 했던 자신만의 밴드를 구체화한다. 튜바와 베이스 연주에 탁월했던 반 친구 웨슬리 제이콥(Wesley Jacob)을 끌여들인 리처드는 동생 카렌과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Richard Carpenter Trio)를 결성했다. 가끔씩 카렌이 보컬에 나서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들 밴드는 주로 악기 연주에 집중했다. 노래 부르는 연습을 따로 하지 않았던 카렌의 목소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카렌 자신도 목소리보단 드럼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싶었다.
하지만 탁월한 음색은 언젠가 빛을 발하기 마련. 1년간 보컬 연습도 겸했던 카렌은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로 신생 레이블인 매직 램프(Magic Lamp) 오디션에 도전한다. 레이블 수장인 조 오스본(Joe Osborn)이 자정까지 그만의 작업을 했기에 오디션은 새벽 1시에 시작했다. 이 오디션에서 밴드는 각자의 재능을 최고조로 발휘하였고, 단박에 합격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부모님은 직접 나서서 계약에 서명을 할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그러나 이 신생 레이블은 새 앨범을 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 밴드가 리처드의 자작곡을 비롯한 몇몇의 수록곡을 완성한 상태임에도 매직 램프는 자금부족으로 1장의 앨범도 발매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번에 이뤄질 수 없는 꿈
하지만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할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 밴드가 아니었다. 이들은 1966년 아마추어 탤런트 콘테스트 중 하나인 더 배틀 오브 더 밴드(The Battle of the Bands) 파이널까지 진출하고 기여코 우승했다. 여기서 남매는 그들이 좋아했던 아이스티를 재료로 자작곡 아이스티(Iced Tea)를 선보였는데 심사위원들은 밴드의 독창성을 크게 칭찬하며 트로피를 넘겼다. 이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는 리처드의 피아노, 웨슬리의 튜바 그리고 카렌의 드럼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들의 즐거우면서도 저돌적인 음악적 재능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 경연으로 여러 레이블의 주목을 받은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 밴드는 1901년 설립된 정통 있는 레이블 RCA 레코드사(RCA Records)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레코드사의 관계자가 주차장에서 리처드에게 직접 명함을 건네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곧바로 음반 제작에 돌입하고 짧은 시간에 11개의 트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회사 위원회는 재즈로 승부하는 이들이 상업성에는 매력도가 떨어질 거라 판단하여 발매를 거부했다. 결국 리처드 카펜터 트리오 밴드는 수 백 달러의 위약금을 받으며 회사에서 쫓겨났다. 연거푸 실패를 겪자 웨슬리는 밴드보단 콘서트 연주자의 길에 들어서고자 밴드를 탈퇴하고, 줄리아드에서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밴드는 해체됐다.
드럼에 가려지길 좋아했던 드러머이자 보컬, 카렌
학교로 돌아간 카펜터 남매. 이들은 반 친구들과 다시 스펙트럼(Spectrum)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하지만 이 밴드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대신 매직 램프에서 연을 맺었던 조 오스본이 다시금 음반을 내자는 연락을 했다. 그새 음악적으로 성숙해진 남매는 음반 제작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의 자작곡 두려워 말아요(Don't Be Afraid)를 비롯한 3곡이 들어간 이 음반은 내용면에서나 결과면에서나 실패였다. 카렌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지만, 음악이 그녀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레이블이 지나치게 작은 회사라는 문제점도 있었다.
한편 카렌 카펜터는 한창 예민한 시기에 봉착해 있었다. 몸무게 때문. 163 센티미터의 키에 65 킬로그램이었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통통했던 자신의 몸매에 자신이 없었다. 드럼 소리에 매료돼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드럼통이 자신의 몸매를 감춰주는 것이 좋았던 게 카렌이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 17세임에도 의사를 만나 식단 개선을 시도했다. 매일 8잔의 물과 각종 비타민으로 식단을 꾸린 카렌은 이를 엄격하게 지켰다. 오빠가 각종 고칼로리 음식을 먹는 것도 옆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덕분에 패스트푸드와 아이스크림을 눈으로만 즐겼던 그녀는 11킬로의 감량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기서 맛본 다이어트의 즐거움은 후에 카렌에게 엄청난 역풍으로 들어닥친다.
연이은 우승 끝에 다시 찾아온 기회
다시 커리어로 돌아가자면, 카펜터 남매는 쉽게 좌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번엔 카펜터스(Carpenters)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시작했다. 전보다 카렌의 목소리에 집중한 이 밴드는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인 유어 올 아메리칸 컬리지 쇼(Your All American College Show)에 도전한다. 베이스 기타 연주자인 빌을 포함한 카펜터스는 가볍게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도합 7000달러의 상금을 거머쥔다. 여러 레이블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실제로 카펜터스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일이 쉽게 풀리진 않았다.
그러다 허브 알퍼트(Herb Alpert)와 제리 모스(Jerry Moss)의 회사인 A&M에서 카펜터스의 테이프를 듣고 음반 제작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했다. 이들은 카렌의 오묘한 목소리와 리처드의 조화로운 코러스에 끌렸다. 1962년 설립된 A&M은 히트곡을 여러 번 써낸 버트 바차라치(Burt Bacharach)와 할 다비드(Hal David)와 같은 작곡가가 여럿 있어서 이전의 소속사보다 확실히 나은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카펜터스는 티켓 투 라이드(TIcket to Ride)라는 싱글을 발매한다. 희대의 그룹 비틀스의 곡을 리메이크한 티켓 투 라이드는 세련된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음원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신인이었고 싱글 음반으로 빌보드 차트 54위에 오른 것을 고무적으로 여겼다. 실제로 싱글 음반은 차트에 오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Close to you & We've Just Begun
절반의 성공을 뒤로한 채, 새로이 음반 작업에 들어선 카펜터스. 이들은 1970년 7월, 커리어 하이 중 하나가 될 음반,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를 발표한다. 버트와 할이 쓴 이 곡은 7월 선보인 곡들 중 가장 좋은 반응으로 발매 첫 주, 빌보드 차트 56위를 기록한다. 곧이어 1위에 오른 클로즈 투 유는 5주간 왕좌를 지키며 70년대 전설로 남을 카펜터스의 탄생을 예고했다. 카렌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족을 넘어 전미에서 호평을 받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카펜터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날로 더해 갔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리처드 카펜터는 곧바로 새로운 음악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크로커 내셔널 뱅크(Crocker National Bank) 광고를 보고, 그 배경음악에 매력을 느꼈다. 이 멜로디에 리처드와 A&M 작곡가들은 추가로 벌스(Verse)와 브릿지(Bridge)*를 덧붙여 노래를 재탄생시켰는다. 그 곡이 'We've Only Just Begun'이다.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른 이 곡은 1970년대 커플들의 웨딩송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제 막 사회에 나설 학생들을 위한 졸업식에서도 왕왕 사용되었다.
카펜터스 남매, 성공하다!
연이은 실패 끝에 카펜터스에게 성공이 줄줄이 엮어 들어왔다. Close to You는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그해 미국 음반차트에서 이름이 밀려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듬해인 1971년에는 3개의 싱글이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영화 연인과 타인(Lovers and Other Strangers, 1970)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곡에 카펜터스만의 색감을 가미한 'For All We Know', 'We've Only Just Begun'의 A&M 작곡가들이 참여한 'Rainy Days And Mondays' 그리고 카펜터스의 매력을 완연히 느낄 수 있는 'Superstar'까지. 세 곡 모두 빌보드 차트 탑 3에 올라 카펜터스의 흥행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Superstar'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재즈 스타일의 리듬 그리고 카렌 특유의 심장 떨리는 목소리로 카펜터스 하면 떠오르는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카펜터스는 또 카펜터스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그래미상 트로피를 또다시 그들 품에 안겨주었다.
이렇게 한 번 터져버린 인기는 화수분처럼 좀체 멎을 줄 몰랐다. 1972-73년까지 카펜터스의 메인타이틀 5곡*은 빌보드 차트 톱텐에 올랐고, 그중에서도 73년 발표한 Top of the World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곡들은 바다 건너 브리티시 차트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성공들엔 팬들의 성원이 따르기 마련. 1971년을 기점으로 카펜터스의 인기는 미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 뻗어 나갔고, 이에 보답하고자 카펜터스는 전 세계 콘서트 투어를 열었다. 미국, 영국, 일본까지 이어지는 공연에서 좌석은 매진되기 일쑤였다.
불행의 씨앗 거식증의 발발
쉬지 않고 매달렸던 음반 작업과 콘서트 투어로 카펜터스는 차근차근 지쳐갔다. 특기할 만한 것은 카렌의 몸무게는 이전과 같은 54kg이었는데, 빡빡한 스케줄 속에 재발한 패스트푸드 홀릭과 불규칙한 식습관 덕이었다. 그러다 1973년 카렌은 콘서트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드레스 속 자신의 모습에 뱃살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던 것. 그날부로 카렌은 개인 운동을 위한 트레이너를 고용하고, 골반운동을 위한 기구를 사들여 매일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독해지는 카렌이었기에, 콘서트 투어를 떠나는 순간에도 이 기구만큼은 꼭 지참했다. 또 1970년 유행처럼 번졌던 건강식 열풍에 발맞춰 카렌은 칼로리 음식을 줄이고, 고탄수화물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운동의 효과는 카렌이 기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과한 운동과 철저한 식습관은 오히려 근육을 늘려 몸무게를 줄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속에 출연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전혀 호리호리해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 카렌은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바로 음식 자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의 몸매에 고민하던 카렌. 그녀는 먹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결국, 1975년 카렌에게 거식증*이 발발한다. 몸무게는 41kg까지 줄어 카렌의 생명력은 고갈되기 시작했다. 심각성을 인지한 소속사와 리처드는 카렌에게 강제휴가령을 내렸다. 카렌은 탐탁지 않았지만 승복했고, 2개월 동안 회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따라서 도쿄와 런던에 예정돼있던 투어는 다음 해로 연기됐다. 오빠 리처드는 팬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각지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져야 했다.
카렌이 회복할 기미를 보이자, 리처드는 투어보다 레코딩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렇게 발표한 음반들은 이전만큼의 인기를 끌진 못했다. 다만, 수록곡 중 하나인 I Need to Be in Love는 1995년 일본 오리콘 차트 5위에 오르는 등 잠재력 있는 곡들도 꽤 있었다. 어찌 됐든 앨범이 완성되자 카펜터스는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작정했다. 일본에서는 21번의 공연 전부 매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ABC 방송국에서 The Carpenters Very First Television Special이라는 일회성 스페셜 방송을 5번 정도 방영했다. 음악이 주가 되고, 토크와 코미디를 겸비한 이 쇼는 방영된 주에 6번째로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1978년 말에는 리처드가 건강을 위해 휴식을 택했다. 이를 놓칠 리 없었던 카렌은 유명 프로듀서 필 라몬(Phil Ramone)과 함께 솔로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카렌의 야윈 몸이 버티지 못했다. 휴식 없이 일에만 매진하는 와중에도 섬섬한 몸매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것. 결국, 거식증이 재발한다. 카렌의 몸무게는 37kg. 1982년, 카렌은 거식증 치료에 일가견 있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주일에 다섯 번씩 이뤄지는 치료에도 카렌은 음악에 대한 고집을 멈출 수 없어 로스앤젤레스로 달려가 금세 녹음을 마쳤다. 지속적인 치료와 고영양식으로 45kg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건강이 괜찮아진 듯 보였지만 갑작스러운 체중변화는 문제를 일으키는 법. 주변인들에게 카렌은 영혼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카렌 자신도 자신의 생명력이 예전만치 못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렌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 마이크를 잡았고, 카펜터스가 건재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버텼다.
그러나 1983년 카렌은 또다시 노래 부르는 것을 이겨내지 못해 회복기에 돌아섰다. 이번엔 치료사가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하기 위해 다우니로 향했다. 한창 양기를 회복하던 중 카렌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거식증 속에서 갑작스레 몸무게를 늘리려다 보니 부작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그녀를 발견한 어머니는 재빨리 911에 신고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이렇게 20세기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7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카펜터스는 카렌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카렌의 보이스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고, 카렌이 없는 그룹 자체도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카렌의 보이스와 러브송으로 세대를 풍미했던 카펜터스를 잊지 못했다. 사람들은 카렌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결국 리처드 카펜터는 팬들의 목마름에 부응하기 위해 카렌 사후, 카렌의 솔로 앨범을 포함한 그녀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앨범을 새로이 발표했다. 또, 카펜터스 음반들을 재발매하여 팬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팬들의 공허함은 끝내 요절해버린 카렌과 함께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숙제로 남아 결코 해결할 수 없었다.
각주, *락뮤직에 대비되어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 부드럽고 절제미가 돋보이며 잔잔한 분위기로 배경음악으로 흔히 사용할 수 있다. 빌보드에선 1961년에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차트로 시작하였다.*= 벌스는 하나의 절을 의미하고, 브릿지는 절과 후렴구를 연결시켜주는 구간이다. *= Hurting Each Other, It's Going to Take Some Time, Good Bye to Love, Yesterday Once More, Top of the World*= 섭식장애 중 하나로 카렌의 특이점으로는 끊임없이 살을 빼려고 하는 증상이었다.
참고,
(인터넷)
Richardandkarencarpenter의 Biography(Richardandkarencarpenter.com)
(영화)
The Karen Carpenter Story, Joseph Sargent(1989, CBS)
Superstar: The Karen Carpenter Story, Todd Haynes(1988, Iced Tea Production)
(도서)
Little Girl Blue: The Life of Karen Carpenter, Randy L. Schmidt(2011, Chicago Review Press)
Yesterday Once More: The Carpenters Reader, Randy L. Schmidt(2012, Chicago Review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