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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Mar 31. 2024

서울쥐의 서울 벗어나기

아홉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학구열이 불타던 동네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영어로 연극을 했다. 고학년은 동네 문화센터에서, 저학년은 반에서 연극을 올렸고 어린이들은 영어 대사를 열심히 외웠다. 나는 또래들보다 영어를 못했다. 분명 일곱 살 때부터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정말 다니기만 했는지 영어 실력은 알파벳을 겨우 뗀 수준이었다. 평소에도 나를 잘 챙겨주던 친구의 엄마는 나의 대사 아래에 한글로 영어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I am a city mouse’ 아래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아이 엠 어 시티 마우스’를 적었다.

그때 나와 친구가 함께 올릴 영어 연극은 <시골쥐와 도시쥐>였다. 친구가 시골쥐를, 내가 도시쥐를 맡았다. 역할 분담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서울에서 나고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련된 도시에 사는 도시쥐가 된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시골의 소박함보다는 도시의 화려함이 좋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도 대도시에 산다는 것은 꽤 멋진 일이었던 것 같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창밖 풍경 속 마천루,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좋았다. 정확히는 도시가 아닌 환경을 몰랐고 내가 경험한 세상을 좋아했다. 비록 <시골쥐와 도시쥐>에서 시골쥐는 도시의 삭막함을 목도하고는 평화로운 시골로 돌아갔지만, 도시쥐에게 도시는 아무렴 세상의 전부이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기도 하다. 영어에 서툴다는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없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자부심을 가졌다는 게. 우쭐함에 취해 도시쥐를 연기했던 기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일찌감치 겉멋이 든 도시쥐는 대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도시쥐를 만났다. 부산에서 온 친구였다. 그 친구도 도시 사람이지만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서울의 인프라에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모든 부산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서울은 어디를 가도 시내라고 하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새로 사귄 서울 사람이 당연하게 지껄이는 순진한 말에 투덜대고는 했다. “아니 이게 보통은 이렇지 않다니까.” 친구는 내가 ‘서울 촌년’스럽게 굴 때마다, 그냥 나를 놀리고 싶을 때마다, 맛집을 찾기 귀찮을 때마다 나를 ‘서울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기는 ‘부산쥐’였다.


어느 여름 나는 부산쥐를 만나러 부산에 방문했다. 친구의 고향에서 토박이의 숨겨진 맛집을 모두 뽑아 먹겠다는 다짐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놀거리가 많다는 서면에 가기 위해 부산역에서 나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았더니 1호선을 타면 되었다.


“부산은 1호선, 2호선 두 개면 다 갈 수 있어.”

“지하철 노선이 1호선이랑 2호선만 있어?”

“야!!”


호통이 돌아왔다. 억울했다. 나로서는 그냥 문장 그대로의 질문을 한 것이었는데. 하지만 부산쥐에게는 그게 서울 촌년의 세상 물정 모르는 발언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지하철이 겨우 두 개뿐이야?’ 친구는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4호선까지 있거든?”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모든 지역이 서울처럼 지하철이 깔린 게 아니란다. 서울쥐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놀라긴 했다. 지하철 노선이 2개가 아니라는 점에서 놀란 것은 아니고 겨우 4개라는 점에서. 지하철 노선이 두 개냐던 나의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서울 촌년’이 맞았기에 예상보다 적은 개수에 충격을 받기는 했다. 부산이면 엄청난 대도시라고 알고 있었는데 지하철 노선이 네 개밖에 없다니, 놀랄 일이 맞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하게 서울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도 서울과 같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내 안에 있는, ‘서울공화국’에 살고 있는 ‘서울 촌년’의 존재를 마주했다.      


서울쥐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왔다. 그것도 강남구에서만. 어린 첫 기억은 포이동, 어린이집을 다닌 이래로 오랫동안 대치동, 그리고 지금은 A동. 내 생활반경은 집-학교에서 옆 동네 서초구와 송파구까지, 지금은 마포구까지도 넓어져 갔지만 여전히 서울이었다. 5분 안에 도착하는 버스와 자유로운 환승이 가능한 지하철 노선, 등교를 도와주는 셔틀버스, 걸어서 음식점-미술관-카페-영화관을 방문할 수 있는 도보길. 이것들이 너무나 당연했다. 이 모습이 아닌 도시를 상상할 수 없었고 도시가 아닌 곳은 모두 논밭이 펼쳐진 시골이었다. 서울 아니면 시골. 끔찍한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울=수도, 경기도=서울외곽, 제주도=귤, 대전=빵, 부산=해운대, 독도=우리땅’이라고 되어 있던 지도 밈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그제서야 왜 타 지역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에게 ‘서울이 다가 아니다’라며 열분을 토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머리로는 ‘그래, 서울에 모든 편의시설이 모여 있고 다른 곳은 그렇지 않기도 하지. 이것은 확실히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지도를 실제로 보면서 도로망을 살펴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몸소 체감했다. 오지 않는 제주도 버스를 1시간 30분 동안 기다리면서 하루에 n번만 운행하는 버스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든 지하철이 설치되어 있고, 차가 없으면 버스를 타면 되고, 영화가 개봉하면 아무 가까운 영화관이나 가면 되고, 콘서트를 한다면 아무 이동에 대한 고민 없이 예매를 하면 된다는 생각은 게으른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지역 격차는 심했고, 비율상으로 서울이 이례적인 도시였으며, 그 와중에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울공화국’이었다.


이제 서울중심주의,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모든 것이 수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특권에 대해 무지했던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당연하게 누려온 특권이 작동하는 순간은 일상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일 뿐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특권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시고 뱉던 공기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것처럼. 나는 내 경험 바깥을 상상하는 일에 탁월하지 못해 늘 피부로 경험해야 깨닫고는 한다. 부산에 지하철이 4호선까지밖에 없던 것을 보고, 제주도 버스 정류장에서 1시간을 넘게 덜덜 떨어 보고, 친구가 ‘너 완전 ‘서울 촌년’ 같아’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트위터에서 서울 사람의 편협함을 지적하는 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 뒤늦은 깨달음에 늘 얼굴이 새빨게 지는 것만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한다거나 그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울에서 사는 게 좋다. 여전히 나에게 마천루는 삭막함보다 세련된 고독을 상징하고, 넓은 8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과 도로를 둘러싼 높은 빌딩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울에서 살아가고 싶다. 이 특권적인 편리함을 포기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서울살이에 길들여진 게으른 몸이 되고 말았다. 아마 서울은 내게 물러서기 어려운 욕심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 분명하다. 실컷 자기반성을 해놓고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살던 곳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


그래도 이제 이 서울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서울중심적, 자기중심적 시선을 벗어나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우물 밖 세계의 존재 자체는 알게 되었으니. 다만, 아무리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미끄러져 떨어지기 일수이다. 아무리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더라도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나 바깥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하는 만큼만을 살 뿐이며 그 바깥의 삶은 상상하는 데 머물 뿐이니까. 서울이라는 나의 지역적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물 바깥을 보려고 하늘을 향해 뛰어야 한다. 내 친구 부산쥐는 서울에 오면서 부산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월료일], [금뇨일]을 제외하고는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온-오프할 수 있는 부산쥐를 보며 생각한다. 서울말을 하는 부산쥐처럼 서울쥐는 서울 바깥으로 나가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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