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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Jan 09. 2019

내일은 세련된 글을 쓰겠지

나의 부끄러움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부끄러움에 이불킥을 날리는 날이 많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땐 내가 이렇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매일 밤 내일은 내가 더 세련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20대 중반에는 내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집에 주부가 있다면 회사엔 비서가 있다. 남편과 아이를 챙기는 것처럼 임원을 챙겼다. 아침을 먹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것이 좋았던 나는 빈속으로 출근을 해서 임원의 아침을 챙겼다. 가끔 임원이 조찬 일정이 있을 때면 그 아침을 내가 먹었다. 엄마들이 자식이 남긴 밥을 먹는 것처럼. 오찬과 만찬 사이에 간식도 챙겼다. 외부 손님이 오시면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퇴근 전에는 탕비실에 한가득 쌓인 설거지가 나를 기다렸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기에 회사에서 월급을 주며 나를 고용했지만 이런 일을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임원에게 주간 보고, 월간 보고 PPT 파일을 보내는 내 또래의 정직원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그들의 시선에 나는 작아졌다. 공부를 더 했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만 가득했다. 좀 더 직장인스러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책을 읽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무렵 [여자로 태어나 대기업에서 별 따기]라는 책을 읽었다.


하찮은 일을 열심히 하라.
그런 태도는 성실함에서 나온다.



라고 작가는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야 조직에서 나에게 그다음 단계의 일을 맡긴다고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며 작가의 말을 믿고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팀과 같은 탕비실을 사용하던 옆 팀의 팀장은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늘 물이나 음료에 얼음을 넣어 먹었는데 본인이 얼려서 먹어도 될 얼음을 굳이 비서에게 시키는 스타일이었다. 그 비서와 나는 책상이 나란히 붙어있었고 매번 얼음이 없다는 팀장의 짜증을 어쩔 수 없이 함께 들어야 했다. 비서는 얼음을 얼려야 한다고 업무 분장에 나와있지는 않다. 하지만 임원이 본인의 업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일이 비서의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매일 같은 짜증을 듣는 게 곤욕이었다. 두 팀이 공동으로 쓰는 냉동실에 얼음이 떨어지기 전에 수시로 얼렸다. 얼음을 얼리기 전에 얼음 트레이를 뜨거운 물에 소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매일 하는 업무 중에 얼음 얼리는 사소한 일도 추가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팀장이 얼음 트레이를 소독하는 나를 보았다. 그 뒤로 그 팀장은 나를 볼 때면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띠셨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얼음 그게 뭐라고 나의 평가가 달라지다니.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을 동료들에게 들키기 싫어서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대충 빠르게 처리했던 습관을 버리고 내가 이런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업무 시간에 누구든 좀 보라며 당당하게 처리했다. 하찮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일을 성실히 잘 해내서 조금 덜 하찮은 일을 맡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일을 맡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퇴사 전에 원천세 업무를 맡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세금 납부와 관련된 일은 금액이 틀리거나 납기일이 지나면 가산세가 생길 수 있어서 일을 하며 부담스럽기도 했다. 중요도를 떠나 나에게 맡겨진 일을 실수 없이 잘 처리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직장인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독후감을 쓰면 항상 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학년 대표로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리는 글쓰기 대회에 나갔다. 글 좀 쓴다는 친구들이 모인 곳에서 부담감에 나는 글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함께 갔던 6학년 대표 언니는 나중에 수상을 했고 나는 당연히 상을 받지 못했다. 그때 나 대신 다른 친구가 대회에 나갔다면 끝까지 쓰고 상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글쓰기는 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방학숙제로 선생님께서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하셨다. 책을 읽었지만 독후감은 쓰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SNS에 일기를 거의 매일 남겼지만 지금 읽어보면 내가 이런 일기를 남겼다니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그때의 방귀같이 뿡뿡 뀌어대던 일기들이 다시 글을 쓰려고 하니 많은 도움이 된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잊혔을 나의 생각과 감정들이 날 것으로 남아있다.


사실 지금 브런치에 에세이를 쓰고 다시 읽어볼 때도 부끄럽다. 부끄럽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쓰면서 글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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