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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Jan 08. 2019

충전의 시간

나의 행복


무기력해서 우울한 건지 우울해서 무기력한 건지 그 둘은 늘 함께라 뭐가 먼저인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가지 확실한 건 뭔가를 해야지 생각만 하고 미루면 내 스스로가 한심스럽고 우울해진다. 그 우울감은 더 깊은 무력감을 불러올 뿐이다. 27살의 겨울. 살면서 가장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하며 발버둥 쳐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능을 앞두고 남들은 모두 주요 과목에 집중할 때 나는 미술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좋아했지만 미대에 갈 만한 실력은 아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경영학을 전공하며 그림 그릴 일은 딱히 없었다. 취업을 하고는 업무에 적응하기 바빴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잊혀졌다.


매주 한번 2시간의 서양화 수업(유화)에 참석했다. 수업이 있는 전날 밤부터 무엇을 그릴지 생각하며 설렜다. 내 앞의 캔버스와 내 손에 들린 붓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수업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매달 하나의 캔버스를 완성할 수 있었던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된 후에나 할 수 있으니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고 평일 낮 미술수업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림 그리는 시간의 행복을 기억했다.


30살이 되어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퇴근 후 2시간 취미 미술반. 화실의 선생님은 내가 그려봤던 기존의 스타일과 다른 그림을 그려보자고 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귀가 얇은 수강생이었다. 추천해주신 설경의 그림을 모사했다. 지루했다. 서둘러 이 그림을 완성하고 다시 컬러풀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림 중에서도 채도가 높은 그림을 그려야 즐거웠던 거다. 다양한 색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나에겐 일종의 컬러테라피였다. 계절 중에서 봄과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이면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새싹, 반들반들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라임색이 좋았고 가을엔 나뭇잎들이 다양한 색으로 변해있어 내 마음도 풍성해진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아무리 그리려 해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빛깔을 한동안 바라본다. 마음이 치유되는 시간이다. 힘들고 우울한 일이 있을 때면 산책을 하고 그리고 좋아하는 밝은 컬러의 옷을 산다. 눈에 띄어 잘 입지는 못하더라도 옷장을 열고 바라만 봐도 기분이 밝아진다.


육아를 하면서 남편이 좋아하는 캠핑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 봄에는 두 돌을 넘긴 딸과 함께 캠핑에 도전해봐야겠다. 나중에 딸에게도 지치고 힘들 때 스스로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남들이 보기에 아주 사소하고 무용한 것이라도.



+ 덧붙이는 이야기


36의 겨울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언젠가 나도 책을 낼 수 있다면,

나의 그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오일파스텔은 알고 보니 크레파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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