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심기

by 석우



양파는 모종 심기에서 시작된다. 가을에 씨를 뿌려두었다가 발로 잘 밟고, 건조와 비를 피해 멍석을 열흘 정도 덮어두었다가 싹이 나면 걷는다. 싹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것이 아주심기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이다. 아주 심기를 하고 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들떠 말라 죽을 일도 없을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중에서 -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고, 결국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IMF 시기에 버금가는 취업난에 전공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안정적인 일자리를 좇아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이나 공기업의 문을 두드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철이 없었던 건지 낭만이 있었던 건지, 공무원 합격송을 부르는 서경석 아저씨를 따라 줄줄이 공시생의 길을 가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안정적인 삶’이 내게는 ‘단조로운 삶’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진로에 관해 물어오면 나의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공무원이 됐든 은행원이 됐든 정장에 넥타이 매고 9시 출근해서 6시 퇴근하는 일 난 못 해.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으면 신문쟁이가 되든 방송쟁이가 돼야지.”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란 놈은 틀에 박혀 사는 걸 어지간히 싫어한다. 덕분에 지금까지 방송과 영상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이리저리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느 하나 편할 날 없이, 지루할 틈 없이 살아오긴 했다.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서 꾸준히 버티고 있었다면 지금쯤 관리자가 되어서 먹고 살 걱정은 안 하고 살 테지만, 지금 나는 여전히 근근이 먹고 사는, 그렇다고 일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엿한 반백수로 성장했다.


모두가 뿌리 깊은 나무가 될 동안 나는 텃밭의 잡초처럼 살아온 것 같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조금만 힘을 주면, 뿌리째 쑥 뽑혀 올라오는, 하지만 또 아무 데나 대충 던져 놓으면 그곳에 다시 뿌리내리고 어지간하게 살아가는 잡초.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하루아침에 도시에서 송두리째 뽑아 시골에 툭하고 던져 놓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골살이 중에도 내가 하는 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의 요청이 들어오면 영상 작업을 해서 납품하고 정산일이 되면 급료를 받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요청 들어오는 일의 양이 줄었다는 것이었다. 프리랜서로 촬영과 편집을 모두 해 왔었는데 시골로 내려온 후 촬영 일은 거의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촬영이 수도권인데 이곳에서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 장비 렌털 문제도 걸림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도 줄고 수입도 준 셈이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돈 욕심은 별로 없고 버는 만큼 쓰면 된다는 생각이어서, 줄어든 수입이 주는 불행보다 늘어난 시간이 주는 행복이 더 컸다. 도시에 살 때와 비교하면 자연스레 지출이 줄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클라이언트들의 연락이 뜸해졌고 자연스레 일도 줄어들었다. 그런 클라이언트들의 심정도 백번 이해는 갔다. 통으로 맡기면 편할 일을 촬영과 편집을 나눠서 외주를 내보낸다면 그들의 일은 두 배가 된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촬영한 소스로 작업하는 게 편하지, 남이 촬영한 소스로, 게다가 현장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리고 퀄리티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굳이 시골에 있는 나에게 일을 줄 이유가 없는 셈인 것이다.


해가 바뀌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진지하게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를 벌든 대출금 갚고 딱 소주 사 먹을 돈만 남아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소주 사 먹을 마지노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소주를 사 먹기는 커녕 소주병이라도 주우러 다녀야 할 판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연금이라도 받으려면 최소 20년은 더 벌어야 할 텐데 그때까지 영상 일만 붙잡고 있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을 거 같았자. 그렇다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없으니, 하루빨리 이곳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 시골 마을에 나를 아주 심기로 했다.




15년 동안 한 분야의 일만 하다가 전혀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막막했다.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우리 지역의 구인 글들을 보고 있자니 더 답답해졌다. 이 촌구석은 일단 채용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올라오는 채용 글 대부분은 사회복지사나 간호조무사, 각종 공장 정도였다. 내가 지원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곳은 공장들뿐이라 여기저기 원서를 내 보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이 나이 먹도록 해당 경력 하나 없는 무경력의 40대 아저씨일 뿐이었다. 이력(履歷) 없는 이력서(履歷書)를 들이밀고 연락해 주기를 기다린 내가 참으로 염치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한 이력서만 남발할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지게차 자격증이나 택시 면허라도 따 놓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무거워질 때쯤, 우연히 집 근처 교차로에서 커다란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O마트 - 신입 사원 대규모 채용>


지난겨울 집에서 멀지 않은 넓은 부지에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아내에게서 그곳에 대형 마트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공사장 가림막이 사라지고 커다란 창고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저기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대규모 채용’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적어도 면접의 기회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내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고, 입사 지원 일주일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십수 년 만에 보는 면접이었지만, 꾸역꾸역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보다 백배는 더 편했다. 나 역시 면접관으로 신입 직원 면접을 많이 봤던지라 나에게 던져질 질문들이 대충 예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텅 빈 이력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 후련했다. 물론 내 사정을 들은 면접관은 하나부터 열까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껏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촌한 것도, 심지어 아무 연고 없는 이곳으로 내려온 것까지. 어느 하나 일반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필사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어두운 과거가 있거나, 돌아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사정을 충분히 들은 면접관은 회사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업무 강도가 세다 보니 퇴사율이 높아서 처음엔 1, 2, 3개월 단위로 계약하게 될 텐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다시 말해 수습 기간이 총 6개월인 셈이었다. 중도 퇴사자가 많다 보니 말 그대로 ‘대규모 채용’ 후 긴 수습 기간을 버티는 놈만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뭐가 어찌 됐든 나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일만 할 수 있다면 그깟 수습이 6개월 아니라 6년 이어도 하겠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나의 절박함이 면접관에게 닿아서인지, 대규모 채용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며칠 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영상 제작자에서 갑자기 마트 노동자 되었다. 육체적으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힘들다. 왜 퇴사율이 높은지 몸소 알 수 있었다. 출근 한 달 만에 몸무게가 8kg이나 줄었고 지금은 2kg이 더 빠진 상태다. 먹는 건 예전과 똑같은데 살이 찌지 않는 걸 보니, ‘아! 이렇게 처먹으려면 이 정도는 몸을 써야 했던 거구나!’라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업무가 낯설고 서툴러서 마치 처음 자대배치 받았던 이등병 시절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때는 나이라도 어렸지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 열두 살도 더 어린 관리자한테 욕을 먹고 있자면 서럽다 못해 이 모든 상황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건 식물이건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심긴 자리에서 그저 죽을 힘을 다해 버티는 방법밖에 없는 것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수습 기간의 절반을 채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떠난 사람과 새로 온 사람이 생겼고 일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귀촌 후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스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었다. 하지만 마트에 출근한 지 석 달 만에 나한테서도 이곳의 냄새가 배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시골 마을에서, 가끔 만나 술 한잔하는 지인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서두를 것도 없고 노력할 것도 없다. 그냥 이렇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이곳에 뿌리를 내린다면 언젠가는 가지도 뻗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 향긋한 하루하루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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