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에 이어 빚투까지 유행이었다.
빚이 자랑은 아니지만 자신의 힘듦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이해받고자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나도 빚이 있다. 심지어 아주 많다.
심지어 어제도 빚을 졌다. 신나는 토요일밤 작꿀이와 무비나잇을 하자며 잔뜩 설레게 해 놓고는 작꿀이 가슴을 뛰게 하는 경주차 엔진소리가 나한테는 어찌나 소곤소곤 들리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 소파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보통은 "이제 자러 가자." 하는 작꿀이인데 어제는 좀 속상한 모양이었는지 입술을 닭똥꼬 모양으로 오므리고 토라진 티를 낸다.
아차.
바쁜 마음 탓에 새벽잠이 점점 없어지다 보니 배가 부른 식후, 어둑해진 초저녁이 되면 나는 엉덩이가 땅에 닿기가 무섭게 상모를 돌려댄다.
작꿀이가 낮에는 엉덩이만 대면 졸면서 새벽마다 살금 거리고 내려가서 부스럭대는 엄마의 수상한 행각이 궁금했는지
"엄마는 나 일어나기 전에 맨날 뭐 해? "
이렇게 묻는다.
엄마가 뭘 하는지 물어보다니......
작꿀이는 나를 인간으로 본다.
난 엄마가 뭘 하는지 궁금해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아닌가?
엄마는 나를 위해 밥을 하고
엄마는 나를 위해 빨래를 하고
엄마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 사람.
이 지경이니 엄마하고 할 얘기가 없다.
중학교 시절 살가운 동생이 수학여행을 가고 아빠는 늦게 들어오시니 엄마와 나만 둘이 있는 거실에 정적만이 흐른다.
" 넌 엄마한테 별로 할 말도 없지?"
내가 그런다.
"그럼 맨날 보는데 무슨 할 말이 있어?"
나도 안다. 엄마가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자유를 누구보다 소망하는 엄마가 내가 그 어떤 새보다 자유롭게 날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나를 통해 엄마가 미처 보지 못한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엄마는 믿는다는 것을 아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엄마의 한쪽 날개인 내가 미국으로 가고 옆에서 날개노릇을 하던 동생이 잠시 미국에 온 후 엄마 표정이 영 어두워 보이더니 최근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 파킨슨의 증상이 도파민 생성이 잘 안 돼서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의 마음을 후벼 판다. 웃을 일이 없어서인가 싶어 애처롭다. 먹고 사느라 내 새끼들 키우느라 바빠서 전화도 자주 못 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매일 전화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다. 나는 전화하기 전에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할까 대본을 짠다. 힘 빠지는 이야기, 걱정시킬 이야기, 잔소리할 틈을 주는 이야기 빼고 해야 하니 공을 꽤 들어야 한다.
내가 꼭 닮은 우리 엄마는 평생 전화기를 5분 이상 붙들고 있는 적이 없었다. 딸내미 방송의 경쟁자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다. 유튜브 박사님들까지 경쟁에 뛰어들어 요즘은 더 치열하다. 대본이 시원찮으면 내 시청률은 박사님들에게 참혹히 묻힌다. 전문작가들에게 나는 경쟁도 되지 않기 십상이다.
오늘도 하나뿐인 시청자를 빼앗기고 허전해하고 있으면 조금 후 카톡이 울린다. 어느 선생님인지 양배추랑 사과를 먹으라고 한단다. 밀당도 유전인지 우리 엄마 밀당 솜씨도 가슴만 뜨거운 나와 별반 다르진 않다.
다른 빚쟁이들은 빚 갚으라고 쫓겨 다니지만 관계 빚쟁이들은 홀로 남겨진다.
관계에 어리숙한 내가 진 빚을 그깟 꼴랑 전화 한통으로 그깟 우리집 거실 영화관 표로 갚을 수 있으려나. 희망적인 것은 관계의 빚은 노력만으로도 차감이 되는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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