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왕관의 무게

책.습.관.

by 책o습o관

나는 왕년 드라마 왕이다. 큰꿀이는 현재 드라마 왕이다. 우리 둘 다 몇 번이고 봤던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상속자들의 부제 "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는 내가 드라마 자체보다 더 좋아하는 문구다.


우리 모두는 왕관이 있다. 관계를 안 맺고 사는 인간은 없고 관계에는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이 따르고, 그 시선이 바로 기대다.

큰꿀이는 고등학교 주니어( 고등학교 4년제 중 3학년)다. 미국은 시니어인 4학년에는 막상 대학입시 당락이 결정된 다음이라 오히려 시간도 많고 스트레스가 적다.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수업시간표를 짜는데 어렵다는 과목들을 죄다 갖다 넣길래 내가 심드렁하게 왜 이렇게 어려운 길만 가려고 하냐면서 만류를 하니 큰꿀이가 하는 말이

" 엄마는 나한테 기대가 없어? 내가 아이비리그에 못 갈 거 같아? "라고 한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나 신기하기도 하고 욕심이 앙큼하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 웃음이 났다.

큰꿀이는 공부를 제법 한다. 공부 때문에 속 썩이는 일도 없고, 자기 할 일도 알아서 했다.

한국으로 치면 고3에 준하는 주니어가 된 큰 아이는 혼자 느긋한 엄마한테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친구들에게 들은 귀동냥으로 SAT시험이 종이 양식에서 컴퓨터 양식으로 바뀐다고 했다. 혹시 어떻게 영향을 줄지 모르니 한번 미리 쳐보는 게 좋다고 한다. 시험 보는 날짜도 알아서 찾고 비용을 내달라기에 카드를 줬다. 그러더니 한 달인가 지난 후에 카톡에 성적표를 찍은 사진이 왔다.

1600 만점에 1600점이다.

얼씨구나. 실제로 아이가 많이 노력했구나 싶어서 눈물 비슷한 것도 난 것 같다. 우리 집안 식구들한테는 힘이 나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점수는 점수일 뿐이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원하는 대학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미국 입시제도가 그렇고 SAT라는 시험의 의미가 그렇다. 운전면허 시험 만점 받는다고 차를 주진 않는 것과 같다.

가족 말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박한 인맥에 자랑할 데도 없거니와 소문내는 것도 쑥스럽고 점수 잘 받았다고 소문내서 기대만 키우는 것보다 나중에 원하는 대학을 가는 게 실속 있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진짜 재밌는 사건은 다음이다. 아이가 한국 학교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봉사를 하다 보니 시간 조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SAT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아이가 자꾸 SAT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가족 말고는 자랑할 데도 없는 소박한 인맥과 무미건조한 성격을 가진 엄마를 가진 탓에 이런 자랑할 기회를 그냥 놓쳐서 아쉬운가?

그래서 소박한 어깨 토닥을 기대하고 옆자리 앉은 선생님께 살짝 얘기했는데 일이 커져서 순식간에 소문이 났고 다른 학부모님들과 아이들한테 큰꿀이는 물론 나도 인사를 받았다. 기를 받는다며 악수도 요청해서 여러 번 해드렸다고 한다.

집에 오는 길에 아이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축하해 주고 부러워해서 좋았어? "

그랬더니 아니란다. 갑작스레 부담스러워졌다고 한다.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관계 방식이 나하고 똑 닮았다. 이제 어느 대학 갈 거냐, 뭐 하고 싶냐 물어보고 의사 될 거 아니라고 했더니 왜 의사 안 하냐고 반문하셨단다.

그러니 의사를 해야 되는 건가? 의사를 안 하면 바보인 건가?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물었다.

" 의사 하고 싶어?"

그건 아니란다. 피도 싫고 그건 진짜 아닌 것 같단다.


아이는 왕관의 무게를 경험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 아이와 나 같은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방에 자랑하고 축하를 마음껏 즐기는 아이들도 있다. 또 뒤에 다른 결과가 좋던 안 좋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성격도 있다.

나도 아이가 느낀 왕관의 무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수능 날 나는 내가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생각을 하느라 시험을 망쳤다. 다행히 큰꿀이는 나 같은 헛똑똑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왕관이 있다. 공부 못하고 노는 아이도 아이대로 왕관이 있다. 어떻게 하면 더 신선한 문제를 일으킬까? 어떻게 하면 전설 같은 존재가 될까? 자기를 선망하는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말 잘 듣는 아이라는 왕관도 있고, 얼리어답터라는 왕관도 있다.


내가 수능을 못 봤던 이유, 처음에 자랑을 안 했던 이유, 그리고 자랑을 한 이유를 아이에게 모두 솔직하게 고백했다. 만점을 받은 것보다 만점 이후에 따라오는 이 생각이 더 소중한 거 같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계속 지켜볼 것만 같고, 기대하니 뭔가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만 아마 1주일, 아니 당장 저녁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남들이 씌워주는 왕관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진짜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성적이 전부인거 같지만 엄마가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 하는 애들이 지금 뭐 하며 사는지 알지도 못하고,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도 말해줬다.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고, 이해한 듯했고 동의하는 듯했다. 큰꿀이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가감없이 할 수 있는 관계라 감사하다.


그러더니 다음 주에 학교 갔다 와서 그런다. 학교에 소문이 나서 애들이 자꾸 점수를 물어봐서 피곤하고 짜증 난다며 투덜댄다. 왕관의 무게를 벗기란 쉽지가 않다. 하나를 벗어도 다른 왕관을 또 씌워 주기도 한다. 씌워주기는 해도 남이 벗겨줄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엔 영원히 벗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벗었다 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왕관을 잘 다루면 타인과의 관계가 편안해진다. 그리고 잠시인 줄 안다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SAT 응시료 55불을 내고 관계까지 덤으로 얻었으니 횡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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