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만 용인되는 미덕 같은 거짓말이 있다.
"거의 다 왔어요."
이 말에 속아 입시 후 친구와 놀라간 삼악산을 치마를 입고 완산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시던 아저씨 거짓말에 속아 바로 앞 한 발을 보고 가다 보니 정상에 올랐다.
거의가 2시간 후인 줄 알았다면 올라가지 않았을 거다.
아저씨는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등산을 싫어하는 친구들은 굳이 내려올 걸 올라가냐고 한다.
산 입구에 있는 맛집에서 경치나 보고 막걸리나 먹자고 한다.
올라갔다 내려오나, 그냥 맛집에서 있나 결국 같은 곳에서 서는 데 올라갔다 오면 달라질까?
대학시절 한라산에 올랐다. 여전히 산을 좋아하진 않던 나다.
날씨 탓에 올라가도 백록담을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니 더더욱 굳이 올라가야 하나 싶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어느 코스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절벽 따라 펼쳐지는 절경은 악악 거리느라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죽을 둥 살 둥 오르막길을 지나 숲 사이로 갑자기 평야 같은 초원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흐린 날씨에 안개까지 껴서인지 마치 요정이 살 거 같은 느낌이었다.
백록담을 봤냐고?
보지 못했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간 것도 죽을 뻔했기 때문에 무슨 대피소에서 돌아내려 가자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는 정상을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날 날씨처럼 내가 어쩔 수 없는 때라는 것도 있다.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정상을 오른 친구도 오르지 못한 친구도 시작도 안 한 친구도 모두 지상에서 다시 만난다.
해본 자, 하다 돌아온 자, 하지 않은 자
겉으로 보기엔 같은 곳에 서 있는데 말이다.
우리의 등산 전후는 여전히 같을까?
꿈을 이룬 자, 찾다 실패한 자, 찾지 못한 자.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꿈을 꾸지 않은 자와 같은 걸까?
편하게 산 입구에서 부침개나 먹고 있자는 친구 이야기에 더 이상 혹하지 않는다.
희한하지 않은가?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굳이 올라가야 할 먼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턱에 받은 감동이 좋은 추억이 됐고 그 기억으로 지금도 행복하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사람이 달리 보인다.
정상에 올라 무엇을 눈에 담고 왔을지, 무엇을 가슴에 담고 왔을지 호기심이 생긴다.
아저씨는 그래서 거짓말을 하셨던 걸까?
속는 셈 치고 가보라고.
산 밑에서 정상을 재단하는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기쁨이라 어차피 설명을 해줘도 모를 테니 거짓말로 꾀신 게 아닐까.
이렇게 블록 스케줄까지 해가며 살면 성공할 수 있냐고?
글쎄다.
그럼 왜 해야 하냐고?
블록 스케줄을 하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건 장담할 수 있다.
뭐가 얼마나 어떻게 달라지냐고?
거의 다 왔다.
P.S.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