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한 건 2003년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그때까지(사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글 쓰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은 없다. 나는 문장을 읽는 즐거움 대신 시각적인 화려함에 이끌리는 부류였다. 글쓰기보다 그림 그리기를 훨씬 더 좋아해서 미술을 전공했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회사 생활에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는데 30대 초반의 나는 먹고사는 일쯤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세상만사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굳건한 마음을 갖추지 못해서 인생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는데도 손을 놓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뉴질랜드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의 마라하우에서 토타라누이까지, 그때 나는 사흘 내내 해안을 따라 혼자 걸어갔다. 해가 저물면 별들로 가득한 뉴질랜드 아벨태즈먼 국립공원 밤하늘 아래 누워 도시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렸다. 작은 원룸과 쌓여 있는 고지서와 카페의 커피와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과의 시간 그리고 무책임하게 외면했던 가능성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삶은 복잡한 미로와 같아서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나를 말해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몫이었다. 나의 본질과는 별개로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동료로 누군가의 부모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설명된다. 관계로 정의되는 나는 본질의 나와 다르지 않다. 삶의 일정 부분은 분명 타인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내부로 향하기 마련이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외면할 수 없다.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은 ‘내가 누구의 무엇이 아니어도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홀로 살고 있지만 정말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을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한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이끌림이 아니라 긴 트랙을 완주하는 것처럼 스스로에 대한 선택이며 행동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행의 끝에서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짧은 여행이 끝나고 두 마리의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 후 낯선 장소에서 느꼈던 특별한 인상은 시간의 위력과 삶의 피로감으로 빠르게 퇴색했다. 하지만 나는 아벨태즈먼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기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함량을 채웠다는 기쁨,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 조각이 수없이 널려 있지만 그대로 자신의 어느 한 부분을 꼭 맞춰 완성했다는 기쁨이었다.
여행의 인상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수면 아래에서 영롱하게 빛났던 찰나의 아름다움을 낚아 올려 보관함에 넣어둔 다음 이따금 그걸 꺼내 보고 싶었다.
《책방으로 가다》는 2017년 《책, 오후, 고양이》라는 제목으로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던 전력이 있다. 유독 팔리지 않았던 책으로 계약 기간이 끝나도록 초판을 소진하지 못했다.
책과 작가들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즈음 더는 여행을 떠나지 않게 되었던 건 확실하다. 여행을 다닐 처지도 아니었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양이 세쯔는 이미 곁에 없었다. 세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열망으로 인생을 채워왔던 나는 텅 빈 미래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다시 삶이라는 길을 가야 했지만, 이전과 같을 순 없었다. 더하는 게 아닌 떼어내야 하는 순간이 왔고 경험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으면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위안이 바로 글이었던 것 같다.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골목 끝을 바라보면서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모퉁이를 지나면 과연 무엇이 나타날까, 언젠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리라는 예감은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최초의 행복이었다.
여행을 멈춘 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국내 여행이건 해외여행이건 심지어 달나라 여행이라고 해도 떠나고 싶었던 진짜 이유, 다른 세상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흔하지만,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되어주었다.
출판 계약이 끝나고 원고를 정리하면서 이제는 이와 같은 글은 다시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책 읽는 취미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타고난 독서가가 아니다.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일은(입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바로 그 능력) 나 같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준다. 독서가란 그런 작업에 크나큰 즐거움을 느끼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문장이라는 다분히 엘리트적인 방식에 담긴 ‘어떤 것’은 내가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지점과 맞닿아 있었다. 그건 책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기 어려웠다. 미술과 음악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글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이었고 사려 깊었다.
《책방으로 가다》는 잠깐이나마 손에 쥐었던 어떤 인상에 대한 기록이다. 타인을 위해 그다지 기억될 필요 없는, 그래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두었어도 상관없었을 그런 것들을 썼다.
오래전 아벨태즈먼을 걸어갔던 그때처럼 나는 여전히 내 앞에 놓인 길을 걷는다. 그때와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지 않는다. 위대한 천재들이 남긴 영원한 유산보다 그저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순간에 대한 애정으로 오늘을 채운다. 아름답게 유영하다가 이내 흩어져 사라지는 것들. 그 안에는 나의 글도 있다.
2024.0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54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