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기록 05
해방촌 문학서점 고요서사의 ‘마지막 월요일 저녁때’는 매달 마지막 월요일 황인숙 시인과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윤독회다. 인원은 10명 남짓, 3월에 시작했고 이번이 네 번째. 6월 도서는 『교양으로서의 시』였는데 예상보다 일찍 마감되는 바람에 황인숙 선생님의 지인 찬스로 참석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순전히 사적인 이유로 교류를 지속하는 사람은 선생님뿐인 것 같다. 이런 나와 정반대로 선생님의 교우 관계는 엄청나게 넓고 깊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방대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다. 이따금 선생님을 만나러 가면 그 자리에 거의 항상 처음 보는 누군가가 있는데 사연을 들어보면 선생님과 만난 지 벌써 십 년, 이십 년째라고 한다.
재밌는 건 선생님의 성격이 전혀 사교적이지 않고 스스로 사교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이다.)
사교에 힘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에게 없는 점을 보완하고 싶어서 친구를 만든다. 내가 훌륭하지 않아도 친구가 훌륭하면 되니까.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 성격을 죽인다.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흔히 성격이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원래 성격이 모나지 않은 인간은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은 성격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탁월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비위가 좋은 사람들이다.
비위가 좋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사람과의 부대낌에 지치게 되고 사교적인 성향을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교류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는 건 어떻게 봐도 일반적이지 않다. 비사교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소수의 타인을 수용하고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나는 싫어하는 걸 참아내는 현명함이 부족한 젊은이였고 현재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다.
관계를 위해 성격을 억지로 참아내던 사람들이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항상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워낙 하찮은 사람이라 이따금 자신의 흉한 본심을 포장지로 잘 덮어놓겠다는 성의마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절망하는 건 평소 그 사람이 보여주던 겉모습과 영 딴판인, 그의 속마음이 아니라 쉽게 기대를 품은 자신의 경박함이다.
선생님은 나를 진지하게 소개하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한다.
”성격은 나쁘지만 글은 잘 써요.“
”친구는 없지만 재주가 많아요.“
처음엔 우울했지만 지금은 최고의 칭찬이로구나, 기뻐하고 있다.